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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렛 도넛_Any Day Now_2012-리뷰

달콤한 쿠키 2014. 10. 12. 20:17

 


초콜렛 도넛 (2014)

Any Day Now 
9
감독
트래비스 파인
출연
알란 커밍, 이삭 레이바, 가렛 딜라헌트, 프랜시스 피셔, 그레그 헨리
정보
드라마 | 미국 | 98 분 | 2014-10-02
글쓴이 평점  

 

루디는 게이클럽에서 드랙 쇼(Drag Show)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폴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고 이혼한 검사고요. 우연히 루디가 일하는 클럽에 들렀던 폴은 첫눈에 루디에게 반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죠.

 

어느 날 루디는 자신의 이웃을 주목하게 되는데, 마르코라는 십대의 그 소년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으며, 마약중독자인 엄마는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고 있어요. 결국 엄마가 마약소지죄로 체포되고 졸지에 고아가 된 마르코는 국가가 운영하는 시설로 보내지지만, 집을 그리워하는 마르코는 그곳을 떠나 이미 제 집이 아닌 곳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 모습에 안타까운 루디는 폴을 설득하여 그와 함께 마르코를 돌볼 권리를 갖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절대 그냥 두지 않습니다.

 

루디와 폴은 선의(善意)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특히 루디는 언제나 사랑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죠. 루디와 폴 커플은 보살핌이 필요한 열네 살의 다운증후군 아이에게 자신들이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장난감과 옷, 제대로 된 잠자리와 음식, 관심과 사랑, 보살핌과 교육. 단 1달러의 돈이나 그 어떤 형태의 보상도 바라지 않는, 오로지 선의에서 비롯된 그 행동을 세상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요? 그들이 바로, ‘비정상적이고 추잡한, 성경에서 금지된’ 동성애자들인데요.

 

이들을 둘러싼 세상은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 증오로 가득 찬 곳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 마르코가 필요로 하는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줄 수 있고, 또 주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루디와 폴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들을 차별하고 미워하고 따돌립니다. 루디와 폴 커플에게 유리할 수도 있었던 법 조항도 아무 필요 없게 되죠. 사람들은 여전히 온갖 술수로 그들에게 방해수를 놓습니다. 왜냐고요? 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이 엄마와 아빠가 아닌, 아빠와 아빠이기 때문이죠.

 

실생활에서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분노나 증오심, 미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에 시달릴 때, 자신의 마음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대부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건 인지상정이죠. 화해를 하던 용서를 빌던, 혹은 계속 싸우던, 그건 나중의 문제고요.

일정한 구조를 갖고 있는 이야기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승-전-결’ 운운하는 드라마 트루기에서 ‘갈등’의 요소는 꼭 필요하죠. 주인공 앞에서 분탕질을 해대며, 주인공의 목적 달성을 방해하는 ‘적수’나 ‘상황’들을 만들기 위해 작가들은 혀를 깨물고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합니다. 주인공에 반(反)하는 장애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야기가 재미있고 더욱 흥미진진해지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것이 없어요. 루디와 폴, 마르코의 사랑스러운 가정을 깨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진짜로 ‘괜히’ 루디와 폴을 미워합니다.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런 설정이라면 ‘허술하다’느니, ‘막장’이라느니, 게시판에 온갖 악플들이 달리겠지만, 이 영화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이들을 미워하는 게 말이 되거든요. 아니, 아무 이유가 없진 않네요. 루디와 폴은 이성애자 부부가 아닌, ‘동성애자 커플이니까’.

 

마르코를 보살필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갖기 위해 두 사람은 ‘법’에 의지하려 하지만, (다들 예상하시듯) ‘법’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 합니다. 오히려 ‘법’은 두 사람을 ‘괜히’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이 주물럭거리기 쉽게 되어있죠. ‘법’은 이 증오자들이 ‘난데없고 근거 없는’ 자신들의 증오와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많은 경우, 이미 ‘법’은 우리들의 안전하고 유익한 삶을 지켜주는 도구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되어버렸습니다. 단순히 주차 위반 딱지를 떼거나 음주 운전 단속을 위한 기준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정의는 없다’는 흑인 변호사 로니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하지만 역시 그의 말처럼 ‘정의를 찾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 하죠. 없는 것을 찾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정의는 원래 없었던 것이 아니고,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해요.

 

퀴어 영화로서 상당히 영리합니다. 여느 퀴어 로맨스처럼 시작한 영화는, 루디 앞에 마르코가 등장하면서 폭넓은 주제를 품게 됩니다. 단순히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다룬 영화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가 지향하는 메시지는 그 경계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진정한 ‘부모 되기’란 어떤 것인지, 타인과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진지하고 끊임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드라마로서 굉장한 여운을 남깁니다. 정말로 참혹한 엔딩 후에, 폴의 나름의 처절한 복수도, 루디의 절규하는 노래도,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합니다. 개인적으로 이게 실화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눈물이 납니다.

 

사족.

영화의 배경인 ‘1979년 미국 캘리포니아’라는 설정은 무시해도 됩니다. ‘2014년, 대한민국 서울’이 된다한들, 별로 달라질 건 많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영화 관람 전에, 법정 장면이나 양육권이란 키워드로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Kramer vs. Kramer)’의 게이 버전 정도로 생각했는데, 솔직히 테드와 조안나의 동기가 어느 정도 세속적인 면을 내포한 반면, 루디와 폴의 동기는 그보다 더 순수하고 ‘개인을 초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테드와 조안나에게 빌리는 친자식이었고, 루디와 폴에게 마르코는 피붙이가 아니었으니까요.

두 영화를 비교하는 것은 이 리뷰의 의도와 동떨어진 얘기라서, 사족에 붙였어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양해하시길. 저도 좋아하는 영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