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양식_메어리 웨스트마콧-리뷰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가 메리 웨스트마콧(Mary Westmacott)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첫 번째 작품인 이 소설은 ‘버넌 데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유모의 손길이 아직 필요하고 피아노를 무서운 괴물 취급하던 유아시절의 버넌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그가 뛰어난 오페라 작곡가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냅니다. 한 개인의 삶을 거의 통째로 다뤘다는 점도 그렇고 분량이 길어(보통 크리스티 장편 분량의 두 배 정도) 대하소설의 느낌을 주죠.
작품의 주인공인 버넌은 소위 ‘음악 영재’입니다. 영국 명문가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음악에 대한 열정과 그 재능을 뒤늦게 발견하고 결국 그 빛을 보죠. 하지만 그 영광엔 우울과 고독의 그늘이 함께 합니다. 버넌은 음악가로서의 꿈은 이뤘지만 그 대신에 많은 것을 희생합니다. 그 희생엔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진정한 사랑이나 보살핌 같은 정신적인 것도 포함됩니다. 심지어 음악가로서의 명예도 오롯이 누릴 처지도 안 됩니다.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잃고 마니까요. 박수를 받을만한 성공은 아닌 거죠. 버넌은 불행한 천재입니다.
원제인 ‘거인의 양식(Giant's Bread)’은 버넌이 치룬 이런 희생을 의미합니다. 위대한 업적을 위해 희생되는 인생의 다른 가치들을 상징하죠. 그 큰 몸을 지탱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먹어치워야 하는 거인처럼 버넌은 자신의 그 위대한 꿈을 위해 다른 가치들을 포기하거나 그것들을 손에 넣을 기회를 만들지 못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으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는 극중 인물 ‘제인 하딩’의 충고는 과욕으로 인해 삶의 다른 많은 즐거움들을 놓치고 있는 요즘의 사람들에게도 먹힙니다. 현대인들에게 그건 ‘균형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죠.
버넌의 이런 운명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칩니다. 결혼까지 했던 ‘넬’과의 관계가 결국 파국을 맞이했던 데엔 넬의 현실적인 욕구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버넌이 유일하게 사랑한 대상은 음악이었으니까요. 나중엔 예술에 대한 교감을 나눴던 제인 하딩이야말로 자신의 진실한 사랑이라고 버넌은 깨닫고 있지만 그조차 의심스럽습니다. 버넌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다른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버넌은 재능을 타고난 것처럼 그런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인간이 재능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재능이 그 인간을 소유하는 것이라는 제인 하딩의 말은 무척 의미심장하고 으스스하게 들립니다. 천재들의 삶이 대체로 불행했다는 말도 일리 있는 말인 것 같고요.
어쩌면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원제의 거인(Giant)은 천재, 그 자체가 아닌 그 재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거인. 잔인하고 무자비한 거인. 그 재능이란 거인은 예술로, 과학으로, 문명으로 발현되기 위해 모든 장애물을 부수고 찢어 산산조각 냅니다. 심지어 그가(혹은 그것을) 소유한 인간까지도요. 압축적인 프롤로그에서 드러난 대로 위대한 성과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이나 그것을 발견하고 연마할 환경, 그리고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한 걸까요.
그런 생각은 오늘날 문명의 이기(利器)가 다른 의미의 ‘날카로운 흉기’로서 인간들의 존속과 안녕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더욱 큰 설득력을 갖습니다. 인간의 갖은 재능들이 이뤄낸 문명의 이면엔 잔혹한 파괴력이 전혀 다른 얼굴로 존재하니까요.
주인공 버넌은 어딘지 작가 자신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수줍고 소극적이며 많은 사람들 속에서 더 외로움을 많이 타는 반면 외골수 같은 모습도 있었던 것이나 작가로서의 면면들 외의 결혼생활 같은 사적인 면에서는 대체로 불행했다는 것(물론 두 번째 결혼은 행복했다고 하지만)도 그렇고, 그런 한 분야에 있어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는 점도 그렇죠. 특히 버넌의 어린 시절은 작가가 자서전에서 드러낸 자신의 모습과 흡사한 부분이 매우 많습니다.
무엇보다 크리스티는 남편의 불륜과 실종, 기억상실과 이혼 등의 일련의 사건들로 점철된 폭풍한철을 지난 즈음(1930년)에 이 작품을 집필하면서 자신의 불행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어쩌면 ‘메리 웨스트마콧’이라는 필명이 절실히 필요했던 이유였는지도 모르죠. 고통과 두려움을 외면하는 버넌에게 ‘피하지 말고 당당히 마주하라’는 ‘프랜시스’ 간호사의 충고는 마치 스스로를 향한 작가 자신의 주문처럼 들립니다. 작가는 이 작품 이후로,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보다 적극적으로 다룬 자전적인 작품, <두 번째 봄(Unfinished Portrait)>를 역시 메리 웨스트마콧이란 필명으로 발표하게 됩니다.
약간 각도를 바꿔서 연애소설로 이 작품을 대하는 재미도 꽤 큽니다. 이야기는 버넌을 중심으로 사촌인 조지핀, 이웃인 시배스천과 넬, 그리고 제인이란 인물들을 배치하여 다각적인 러브스토리를 엮어나갑니다.
특히 버넌의 연인인 넬은 무척 잘 만들어진 인물입니다. 이 사람의 욕구는 너무나 보편적이고 인간적이라 오히려 독자들의 원망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 캐릭터에 있어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인 동시에 억울한 부분이기도 한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양면성을 교묘하게 저울질하듯 작가가 독자들을 희롱한 결과죠. 독자로서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본인은 넬을 단순히 ‘속물’로만 여길 수 없었는데 그 욕망이 본인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넬의 결말이 마냥 불행해 보이지만은 않았어요. 어쩌면 오히려 잘 된 일일 수도 있는 거죠.
작가는 여러 캐릭터들의 마음을 마치 자신의 마음인 양 풀어내는데, 그 적확하고 탁월한 심리묘사는 크리스티의 다른 추리소설을 읽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쾌감을 줍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주의 깊은 관찰을 쉬지 않았던, 크리스티의 작가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죠.
이 작품을 읽으면서, 만약 크리스티가 이 이야기를 추리소설로 썼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습니다. 대저택을 상속받지만 가난뱅이와 다름없는 버넌, 그를 사랑하지만 결혼으로 인한 신분상승을 꿈꾸는 넬, 성공적인 사업가이면서 조지핀을 사랑하는 시배스천, 그리고 열정적이고 변덕이 심한 조지핀 등의 인물들과 그들의 배경이 작가의 추리소설 속에서 무척 익숙했기 때문이죠.
사실, 이 작품의 후반부의 기둥 플롯인 이녹 아든(Enoch Arden)의 테마는 작가의 다른 추리소설, <메소포타미아의 죽음(Death in Mesopotamia, 36년 작)>이나 <파도를 타고(Taken at the Flood, 48년 작)>에서 재사용됐었죠. 죽은 줄 알았던 전남편이 살아서 돌아온다는 것인데, 두 작품 모두 재혼한 부인들이 살해당하고 살아 돌아온 남편이 의심받으며 범인은 전혀 뜻밖의 인물로 밝혀집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설정에서라면 예외일 것 같아요. 오히려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살해당하고 살인범은 재혼한 ‘넬’이 될 가능성이 높죠. 버넌의 죽음과 재혼으로 넬이 얻은 것이 상당하니까요. 넬은 그것들을 아마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아요.
반면 제인 하딩의 캐릭터는 탐정 역에 가깝습니다. 제인 하딩은 이 작품 바로 전에 발표된 <목사관 살인사건(Murder at the Vicarage, 30년 작)>으로 데뷔식을 치룬, 여탐정의 대모격인 ‘제인 마플(Jane Marple)’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 있죠. 물론 독설가로서는 제인 하딩이 한 수 위지만요.
작가가 결말에서 소외시킨 인물들이 두 명 있습니다. 버넌의 엄마 ‘마이라’와 넬의 두 번째 남편 ‘조지 채트윈드’는 어떻게 됐을까요. 특히 조지의 생사는 무척 궁금해요.
사족
3부 중간 쯤에, 살면서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겪은 작가의 전쟁에 대한 통찰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쟁이 끔찍하다는 건 물론이지만 그 원인과 영향이 한결 같다는 것엔 소름이 돋더군요. 전쟁 역시 문명의 산물이고, 전쟁 그 자체보다 그것을 기획(!!!)하는 사람들이 더 사악한 존재라는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죠.
이 작품의 주인공 ‘버넌 데어’는 작가가 46년에 발표한 추리소설, <할로우 저택의 비극(the Hollow)>에서 완벽히 환생합니다. 누군지 한 번 맞춰보세요.
도서 정보는 아래로...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54635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