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웨이 프롬 허_Away From Her_리뷰
어웨이 프롬 허 (2008)
Away from Her
8.6
그랜트와 피오나는 40년 넘게 동고동락해 온 부부입니다. 부부로서의 삶엔 고비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피오나에게 알츠하이머병의 징후들이 나타나자 부부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의 건강이 염려스럽고, 아내는 자신의 품위를 잃을까봐 두렵죠. 결국 피오나는 치매 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에 들어가고, 그 곳에서 남편을 알아보지 못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됩니다. 더 나쁜 건, 그곳의 다른 환자인 오브리와 사랑에 빠졌다는 거지요.
이 영화는 영화 학도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위 드라마적 도구들의 기준에 의한다면, 트집 잡을 게 무척 많은 영화입니다. 커다란 아이디어도 없고, 갈등도 약하고, 뚜렷한 사건이 터지지도 않습니다. 인물들의 심리는 날카롭고 예리하지만, 그들은 어느 한 순간도 감정을 폭발하지 않고, 주제는 묵직하지만 작은 목소리로 조곤거릴 뿐이죠. 전체적으로 밋밋하고 나른하며 조용한 영화예요. 그렇다고 이 영화의 장점들이 고스란히 배반당하진 않습니다.
영화는 뚜렷한 서사와 극적인 클라이맥스, 엔딩의 반전보다는 각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에 더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물 묘사는 정확하고 깊이가 있으며, 그들의 대사는 효과적이고 재치가 넘칩니다. 영화는 또한 무척 경제적입니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그렇고, 다루는 공간 배경도 피오나의 요양원과 그랜트의 집을 오고갈 뿐이죠. 그 안에서 최대의 드라마를 이끌어내는 도구는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그 인물들에 의한 드라마는 상당히 치열하기까지 합니다. 치매로 기억을 완전히 잃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아내에게 묘한 질투를 느끼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그랜트, 오브리의 아내로서 그랜트와 동변상련의 감정을 느끼는 매리앤의 심리는 많은 공간을 부여하지 않아도 처절합니다. 그 심리 드라마의 중앙엔 피오나라는 치매 환자가 있고요.
영화는 질병을 시작으로 삼지만, 정작 하고 있는 이야기는 죽음이 아닌 삶입니다. 결말에 죽음도 없고, 눈물바다도 없습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그들은 그 안에서 계속 숨쉬고, 먹고, 사랑하며, 대화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소재를 다루는 자세도 남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 정작 그 소재가 가기 쉬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이별의 슬픔, 질병 그 자체의 고통 등을 피해 가거든요. 대신 그 안에서의 사람들의 감정과, 그들의 삶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무게, 질투와 그리움, 고통과 위안, 이별 후에 남게 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죠. 이 영화는 무척 거울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영화가 정작 죽음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고 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죽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 속의 죽음은 그리 어둡고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죽음이란 현상이 언제나 우리의 주위에 있는 친숙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기도 한 거죠. 영화 속의 인물들은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드리워진 그늘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의식에 이유가 있습니다. 기억이 사라진 피오나를 바라보는 그랜트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줍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공유했던 것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의식과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하려는 피오나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질병의 고통이나 죽음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과 나눴던 감정과 추억의 상실입니다. 그것이 현실로 드러난 후엔 그녀는 가차 없이 무너집니다. 그건 그랜트도 마찬가지고요.
어쩌면 우리의 삶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과정이 아닌,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한 아무런 미련을 갖지 않고 죽음을 맞는 것은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죽음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요.
2006년 작이고, 배우 사라 폴리의 장편 연출 데뷔작이라고 합니다. 연기를 하면서, 그 동안 단편 영화로 연출 경력을 꾸준히 쌓아왔더군요.
배우들의 연기도 모두 좋습니다. 이듬해 골든 글로브는 피오나의 캐릭터를 연기한 줄리 크리스티에게 트로피를 안겨 주었지만, 저는 그랜트와 매리앤의 캐릭터를 연기한 고든 핀센트와 올림피아 듀카키스의 연기가 더 좋았습니다. 연기할 공간도, 그리고 관객으로서 감정이입할 여지도 더 많았고요.
사족입니다만, 저는 엔딩 이후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습니다. 아내를 위해 자신의 사랑을 양보한 그랜트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요? 그리고 오브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브리 입장에서라면 참 난처한 상황이었을 텐데요.
또 사족. 우리나라 개봉 당시 ‘로맨스 그레이’나 ‘불륜’을 다룬 영화 정도로 소개된 것 같아요. 마케팅 포인트를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은 거죠. 대체 그 사람들, 영화나 보고 마케팅을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