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개그맨_김성중-리뷰

달콤한 쿠키 2016. 6. 6. 03:06



모임에서 이 작품집에 실린 <개그맨>을 읽기로 했습니다. 작가나 소설집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으니 어떤 편견이나 기대도 없이 그 작품을 읽었죠. 그리고 안 읽어도 될 다른 작품들까지 읽게 됐습니다.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이 작품집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이었습니다. 집들이 공중에 부양하고, 그림자가 뒤바뀌고, 하루아침에 대머리가 된 사람들 머리에서 꽃이 피어나고, 의자가 말을 걸고, 거의 이런 식인데, 작가는 그것들이 반영하는 현실을 독자들 스스로 생각하게끔 유도하고 있어요. 한 작품만 읽어도 될 책을 모두 읽어낸 데엔 몇 개의 단편들이 꽤 진지한 질문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의 젊은 사람들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는 <허공의 아이들>에서는 어느 날 공중에 부양하기 시작하는 세계와 맞닥뜨린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건물들은 나날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저 아래 땅들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아래로 꺼지죠. 집 안에 남아 갇혀 있다시피 한 아이들에게 남은 거라고는 추락하는 일 뿐입니다. 게다가 그런 혼돈과 공포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하루가 멀다하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고요.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 기어코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을 통해 독자들은 현재 우리의 삶과 사회를 봅니다. 살기 어렵고 각박해지는 현실 속에서 적당한 수준의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구하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양육하며 사회에 스며드는 평범한 삶조차 힘에 겨운 사람들은 무너져가고 있는 세상과 사라지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남은 아이들이 부득부득 자라고 있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삶을 살아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지만 우리가 선택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인간의 자연성과 의무를 포기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과연 옳지 않은 일을 하려는 걸까요. (어엿한 사회인으로) 그저 살아간다는 것, 그런 삶의 평범한 통과의례 같은 일들마저 버겁게 느껴질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그림자가 뒤바뀌는 가벼운 소동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띠는 점입가경의 진행이 인상적인 작품인 <그림자>는 인간의 폭력성에대한 진지한 질의를 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의 ‘빛’과 ‘어둠’이라는 소재는 그 분명한 명암처럼 인간의 선한 면과 악한 면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빛’은 시선을 허용하지만 ‘어둠’은 그것을 차단합니다. 작가는 그림자가 뒤바뀐 사람들이 안전과 자존을 위해 어둠을 찾아 들면서 드러나는 폭력의 양상들을 통해 ‘익명’ 뒤에 숨은 폭력을 고발하고 있지요. 제 그림자를 찾은 후에도 형태를 달리한 폭력들이 여전한 것을 보면, 작가는 아마도 인간의 타고난 성정은 善(선)이 아닌, 바로 惡(악)에 가깝다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표제작인 <개그맨>은 겉으로도 알맹이로도 ‘여행기’로 읽힙니다. 소극적인 태도로 연인과의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했던 주인공이 바다 건너 임종을 맞은 옛 연인의 뼛가루를 뿌리러 ‘미국으로 가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이면서,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미처 드러내지 못한 감정을 탐색하는 ‘내면으로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죠.

작품은 다이내믹한 사건이나 특이한 설정 없이, 단순한 서사와 최소한의 인물로 진행됩니다. 알고 보면, TV드라마에나 어울릴 멜로드라마 같은 소재이지만 이 작품이 신파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독자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남길 수 있었던 건,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난 작가의 주제의식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이 최고로 발휘된, 작품집의 백미라고 할 수 있죠.

사실, 알고 보면 이 우주에서 가장 비밀스러우며 불가해하고 예측할 수 없는 대상은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가끔 세상을 볼 때 색안경을 끼는데, 그건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우리 밖의 타인이나 세상을 바라보고 관찰하며 이해하려는 만큼, 우리 자신에게 진심으로 화해를 구하거나 스스로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그 실체를 인정하며 드러내는 것엔 인색한 편입니다. 그건 우리가 ‘나이니까’라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기 쉽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지만, 그건 어쩌면 자만일 수도 있어요.

이 작품에서 작가는 독자들에게가 아닌,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도 그렇게 하길 권하고 있어요. 마음의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내면의 저 깊은 바닥까지 다다라 진정한 기쁨, 슬픔, 두려움과 분노 같은 감정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일생을 가둬두었던 지느러미를 움직여 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140살인 미래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버디>는 퀴어 작품으로 읽힙니다. 돈과 유전자에 의해 정해진 의료 등급에 준하여 치료 수준이 정해지는 작품 속의 세계는 철저히 돈에 의해 지배되죠. 늘어가는 노령인구를 저지하려 약품 판매에 나이 제한을 두는 의료업계의 비리는 낯설지 않으며 그것을 돕는 정치인의 모습은 오늘날 재벌의 막후(幕後) 세력처럼 되어버린 우리의 정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 ‘버디’를 사랑하는 ‘나’와 그런 나를 사랑하게 된 ‘R’이 등장합니다. 동성애와 이성애를 엇지르고 있어 받아들여지지도, 그렇다고 내려놓을 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은 작품 속 표현대로 ‘사회와도 죽음과도 멀어진’ 노인들의 삶을 테러와 범죄의 현장으로 뛰어들게 하는 데에 일조합니다. 감긴 것도, 뜬 것도 아닌 버디의 불구의 눈은 세상에 대한 외면, 그럼에도 여전한 애잔한 미련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게발선인장>엔 사이비 종교의 교주와 하나 뿐인 신도, 그리고 그들의 낡아빠진 성주에 세를 얻은 새내기 대학생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은 ‘사이비’란 말에 새 출발을 위해 얻은 집이 찝찝하게 느껴지지만, 곧 신도 할머니와 교주 할아버지 사이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들의 삶에 동화됩니다.

타인에 의해 구속받는 삶의 자유, 종교에 앞서는 ‘믿음’은 지극히 주관적이어야 한다는 주제는 주인공이 결말에 목격하는 환상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무는 주인공의 경험은 오늘날 종교의 이중적인 모습을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도 보이죠.



소설가를 지망하는 주인공과 그에게 느닷없이 말을 걸어오는 의자와의 교감을 다룬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는 작가의 등단작입니다. 유머와 페이소스, 추억과 그리움이 혼재(混在)하는 이 작품은 ‘지금의 나’를 있게 여러 도움을 준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헌사와 자기고백으로 읽힙니다. ‘그 분이 오셨다’는 작가들의 농담에 진지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의 위트가 남다른데, ‘글쓰기’라는 행위에 있어, 자신을 ‘주체’로 보지 않는 작가의 시선이 독특합니다.



머리카락 대신에 꽃이 자라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머리에 꽃을>은 혼합된 장르가 독특한 분위기를 냅니다. 이국의 배경과 우화적인 사건, 소동극과 코미디로 범벅되며 시작된 이야기는 실종 사건과 살인이 일어나면서 미스터리의 양상을 띱니다.

머리에 난 꽃들은 중의적입니다. ‘비로소 삶의 전성기’를 맞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동시에 겉치레일 뿐인 ‘인간의 허울’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죠.

누구보다도 꽃을 사랑하는 ‘수하일라’는 마을에서 꽃이 자라나지 않아 대머리로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질투에 사로잡혀 연쇄살인에 빠지고 그 죄책감에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며 자살을 한 수하일라의 머리에서 뒤늦게 꽃이 피어나는 엔딩은 기묘한 페이소스를 남깁니다. 수하일라의 경우는 ‘단지 꽃이 늦게 핀 것 뿐’일까요, 아니면 운명을 가지고 농락한 ‘신(神)의 사소한 장난’이었을까요.



<별주부전>의 소재와 이야기를 가볍게 튼 <간>은 그 구석구석마다 상징과 은유로 충만한 작품입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단지 토끼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주인공은 역시 인간의 외모를 한 거북이를 따라 바다 속 용궁에서 열리는 토끼 간 콘테스트에 참가하게 됩니다.

삶을 계속 살아가기 위해 ‘간에 서린 트라우마’를 먹어야 하는 용왕이나, 특별한 ‘정서적 외상’으로 특별한 간을 가진 토끼를 선발하는 생방송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고 소비하는 요즘의 방송과 미디어에 대한 은유로 보입니다. 그것은 과연 타인을 진정으로 위로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자신의 안락과 행복, 얄팍한 자기 위안을 위함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단지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는 가학적인 즐거움을 위함인지 작가는 묻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삶에 상흔을 안고 있는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를 짓는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의문일 수도 있겠고요.



정신분석의 텍스트를 다분히 품고 있는 작품인 <순환선>은 이 소설집에서 가장 어두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안전하지만 지루한 현실과 위험하지만 도전과 모험이 있는 꿈이 병치되어 진행하다가 갈수록 어디가 꿈이고 어디가 현실인지 모호해지는 진행이 인상적입니다.

‘일상의 나’는 평범한 것을 이루고 그 소소한 결과에 만족하지만 언제나 작가로서의 일탈을 꿈꿉니다. 하지만 안전한 일상을 포기해야 하는 작가로서의 삶엔 꿈 속에 도사리고 있는 좀비와 괴물들처럼 가난과 불안정함이 도처에 위협으로 존재하죠. 꿈 속에서 괴물들을 피해 주인공 앞에 느닷없이, 하지만 어김없이 나타나는 막힌 벽처럼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기는 보통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글쟁이로서의 욕망을 터뜨리기 위해, ‘순환선’이란 제목처럼 평범함과 지루함의 반복일 뿐인 돌고 도는 일상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가로서의 이런 고백은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와 <간>에서 보였던 것과는 사뭇 다른데, 이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의식은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따르는 공포와 두려움에 가깝게 보입니다. 스스로의 욕망을 냉정하게 들여다본 결과물로 읽혀요.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창작물로 소통하려는 예술가들에게 데뷔작은 그 성공 여부는 떠나서 매우 커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초심자로서 자신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요. 마찬가지로 이 첫 소설집에서 김성중 작가는 아직 많이 수줍습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외부의 독자를 향해서가 아닌, 작가 자신을 향해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럼에도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작가의 개성과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작가가 마냥 수줍어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겸연쩍어하면서도 씩씩하게 악수를 권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거든요. 젊은, 아직은 독자들과 충분한 소통하지 못한 작가의 그런 패기를 다음 작품에서도 기대해 봅니다. 좋은 독서 경험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