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단편)_김승옥-리뷰
‘김승옥’의 단편소설입니다.
승진을 앞둔 ‘윤희중’은 휴가차 고향인 ‘무진’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친구, 후배들이 섞인 술자리에서 ‘하인숙’이라는 음악교사를 알게 되고, 희중은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는 인숙과 섹스를 하고 서울로 올라갑니다.
이야기 자체는 밋밋합니다. 그리고 약간 두서없어요.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에피소드들은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다소 생뚱맞게 보입니다. 김승옥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게 작가의 방식 같아요.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 속 키워드들을 연결하고 이야기를 ‘해석’하고 그 감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초대장 같은 거죠.
하지만 이야기의 저변엔 어떤 ‘두께’가 있습니다. 이 작품이 갖는 볼륨감은 윤희중이라는 캐릭터를 보여주는 작가의 방식과 작품을 통해 말하려 했던 어떤 메시지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윤희중에게 무진은 자신이 나고 자란 기억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평온과 안락의 장소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무기력과 나태,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일깨우는, 그런 불편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고향에 대한 주인공의 긍정적인 태도는 ‘고향’이라는 단어 앞에 우리들이 으레 취할 수 있는, 어느 정도 학습되어 적극적인 성찰이 개입되지 않은 것인 반면, 고향에서 느끼는 ‘불편함’이라는 감상은 희중의 보다 솔직한 속내로 보입니다.
희중의 불편함의 근원은 그 내면 저변에 흐르고 있는 ‘수치심’입니다. 희중은 여태 비겁하게 살았고 기회를 노려 왔으며 그런 자신을 방치해 왔습니다. 희중은 무진의 특산물인 안개를 가림막, 혹은 보호색으로 삼아 자신의 진짜 모습을 덮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차단하고 싶어 합니다. 읍내 광장에서 본 미친 여자의 광기를 빌어도 괜찮고 죽음 같은 것도 그럴 듯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살한 술집 여자에게서 동질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건 비슷한 맥락의 욕구로 보이죠. ‘미치거나 죽거나’ 모두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희중의 욕구로 읽히지만 단 한 순간도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희중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런 (비겁한) 삶을 계속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는 그런 삶에 대해 강요당했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과거나 현재나 희중은 그런 (비겁한) 삶을 강요당했습니다. 모친 때문에 전쟁에 참가하지 못했고 곧 있을 승진에도 장인의 입김이 작용하리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희중의 수치심이 드러납니다. 그 수치심은 자신의 본 모습, 비겁했던 과거 등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이어지고 거기에 고향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까지 보태져 그것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유부남 주제에 촌에서 만난 낯선 여자와의 원나잇을 전혀 서슴지 않는 모습은 연민과 동정을 가장한 가부장적 온정주의에서 비롯된 파괴적 행동으로 보입니다. 속된 자아를 고결한 껍질로 위장한 희중은 차라리 대책 없이 솔직해서 오히려 고결해 보이기까지 하는 인숙에게 걷잡을 수 없는 질투를 느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숙과의 섹스는 여성성의 파괴인 동시에 과장된 남성성으로 읽힙니다. 그리고 엔딩에서 희중은 서울로 데려가 달라던 인숙의 요구를 묵살합니다. 하룻밤 인연이지만 잠자리까지 같이 했던 여자를 (거의 ‘쌩까는’ 수준으로) 아랑곳도 하지 않고 서울로 가는 모습은 줄행랑에 가까워 보입니다.
‘출세한 서울 사람’이라는 외피를 걸치고 내면의 ‘속물근성’을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덮고 있는 희중은 그럴싸한 말로 스스로 핑계 대는 것을 멈추고 유혹들을 거부하며 제 의지 대로 용기 있게 살 의지가 필요해 보입니다. 희중의 비겁함은 자신의 의지입니다. 희중이 자신의 무위(無爲)를 바라보며 혐오감을 느끼는 모습은 가증스럽기까지 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짐작컨대 작가는 희중의 우유부단하고 비겁한 모습을 빌어 현대인들의 나약하고 의지박약함, 그리고 그것이 통하는 사회를 비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 작품이 소개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작가가 꼬집으려 한 바는 여전합니다. 반세기도 훨씬 넘은(1964년 작) 이 작품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먹히는 건 ‘주제의 보편성’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얼핏 윤희중 개인의 이야기처럼 보였던 이 작품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니까요.
슬픈 소리지만 인간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기회주의자가 되고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으며, 자신의 이기심에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건 어쩌면 인간의 본성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집의 다른 작품들 중, 비슷한 테마를 다룬 <생명 연습>이나 인간의 ‘파괴 본능’을 드러낸 <건>에서처럼, 작가는 인간 행동의 외부로의 파급 효과보다는 ‘인간 자체’를 탐구해 온 것 같습니다.
약간 섣부르다는 생각이 들지만, 작가는 이야기 속의 에피소드들을 어떤 원인과 결과로 보기보다는 인간 자체로 다룹니다. 바로 이 인물이 이렇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한다는 거죠. 사건들의 연결고리(인과관계)가 부족하고 다소 뜬금없이 보이는 이유도 바로 그런 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더 많은 작품들을 접해봐야겠지만요.
이 작품에서도 작가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캐릭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삼습니다. 설명이나 서술에 의존하지 않고 인물을 ‘보여주고’ 있죠. 이런 부분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약간 어렵게, 그리고 더 깊이 있게 만드는 것 같은데, 영상 작가로서의 적지 않은 이력이 꽤 도움이 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런 점은 본받고 훈련해야 할 부분 같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포함한 몇몇 작품들에서, 그 기저에 흐르는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고가 약간 거슬립니다. 이걸 시대상의 반영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작가 자신의 세계관이나 성격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니면 그런 캐릭터를 만드는 것에 장기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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