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_바바라 아몬드-리뷰

달콤한 쿠키 2017. 6. 23. 06:05


‘양가감정(兩價感情)’에 관한 저서입니다.

양가감정이란 단어는 괜히 어려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논리적으로 서로 어긋나는 표상의 결합에서 오는 혼란스러운 감정’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바바라 아몬드(Barbara Almond)’는 책 안에서 그것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때마다 약간 다르게 설명하는데, 그 설명들이 서로, 그리고 사전적인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첫 장의 첫머리에서 저자는 간단하고 꽤 명확하게 정의를 내립니다. ‘소중한 사람을 향해 느끼는 사랑과 미움의 복합적인 감정(29쪽)’이라고. 우리가 흔히들 ‘애증(愛憎)’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거죠.


우리가 살면서 만나고 서로 얽는 관계 안에는 다양한 감정이 존재합니다. 그 ‘다양한 감정’엔 긍정적인 부분도 있고 부정적인 부분도 있고, 둘이 섞여 있을 수도 있고요. 타인과의 관계야, 싫은 부분이 더 많다면 더 이상 힘을 쏟지 않아도 되지만, 세상에 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평생 가까이 함께 할 사람들, 즉 가족들과의 관계라면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닐 겁니다. 바로 그 가족관계 안에 돋보기를 들이댄 저자는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와 감정, 특히 아이에 대한 어머니들의 양가감정에 주목합니다.


작가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양가감정이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임을 설득하고 그 감정이 어머니와 아이 모두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산하자는 거죠.

모자(母子, 단순히 엄마와 아들이 아닌, 엄마와 자식) 관계는 우리가 태어나 갖게 되는 가장 최초의 유의미한 인간관계입니다. 외부의 공격이나 위험에 완전히 무방비인 유아들은 그들의 보호자로서 부모, 특히 엄마라는 존재에 완벽히 의지합니다. 하지만 공격의 주체나 위험의 원천이 그 ‘엄마’라면? 저자는 그 질문에 주목합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장 연약한 유아를 향한, 가장 믿을 만하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인 엄마에 의한 폭력(육체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폭력 역시) 뒤에 숨은 ‘양가감정’을 우리는 여태 주목하지 않았음을 저자는 일갈합니다.


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가, 정신과의사이기도 한 저자는 양가감정의 원인에 대해 ‘투사(projection)’와 ‘오이디푸스 장애(Oedipus Complex)’ 등 여러 가지를 지적하지만 그것들은 ‘아이의 욕구와 어머니의 필요가 서로 충돌하는’ 결과로 일축됩니다.

저자는 어머니들이란 존재 그 이전에, 그들 역시 각자의 이름을 갖고 있듯 다양한 욕구와 필요를 지닌 한 개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어머니라는 자격에 부여되는 그들의 양가감정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거나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종종 비극적인 결과(최악의 경우, 자녀 살해 같은)로 이어진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어머니의 양가감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모순의 감정을 인정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모성의 부정적인 면을 ‘어머니로서 겪는 심리적인 경험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여겨 자신의 정체성에 통합(319쪽)’할 때, 양가감정 해소의 실마리가 트인다고 저자는 조언합니다.




저자의 다양한 임상 경험과 여러 소설, 영화들에서 양가감정의 예를 들고 있는 이 책은 상당히 다채롭습니다. 특히 저자의 직접적인 경험들은 양가감정에 대한 스펙트럼을 폭넓게 보여주는데, 이는 양가감정이 어머니와 자식 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닌, 조부모와 부모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무의식적 동일시’라는 심리적 기제는 '욕 하면서 배운다‘는 우리 옛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다양한 사례들 중엔 과연 이런 감정, 이런 행동도 양가감정에 의한 것인지 의아한 경우도 있지만 이는 양가감정의 영향이 단순히 모자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가족, 인간, 나아가 사회로 확장되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임상치료를 통해 실제로 겪었던 환자들의 이야기들은 각각의 충격과 감동이 있는 드라마입니다. 누군가는 행복한 결말을 맞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삶이 연극이라면 분명 비극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양가감정의 부정적인 측면에 더 많은 무게를 두기 때문인 것 같은데, 모성애란 증오나 미움 같은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믿음이 보편적이니, 그 단어에 실린 그림자가 더 어두워 보이는 탓이겠지요.


감히 말하자면, 그것은 편견입니다. 그런 편견은 ‘모성애’에 대한 우리들의 뿌리 깊은 환상이 개입된 결과입니다. 엄마는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모든 것을 이룬다는(전능하다는) 믿음은 우리가 엄마들에게 부여하는 ‘짐’과도 같습니다. 이런 사회문화적인 기대 또한 어머니들의 양가감정을 부추기며 그들을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모성애’를 다룰 때 ‘희생’과 ‘전능함’을 강조하는지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TV나 미디어에서 제공하는 환상은 거의 아집에 가깝습니다. 사회는 모성애의 ‘구원적’인 면모만 부각시키고 ‘파괴적’인 부분은 무시합니다. 그런 시선, 혹은 평가는 엄마들에게 폭력으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에서 엄마들의 양가감정을 숨기고 부정한 이유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모성애의 밝은 면에만 집중할까요. 모성애에 도사린 어두운 면은 ‘너무 치명적이라’ 야기될 사회적 혼란이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저자가 양가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든 문학작품들은 꽤 적절합니다. 특히 ‘메리 셸리(Mary Shelly)’의 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과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의 <다섯 번째 아이(Fifth Child)>와 ‘윌리엄 마치(William March)’의 <나쁜 씨(the Bad Seed)> 등의 소설은 양가감정이라는 주제 아래 새롭게 해석한 관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아이라 레빈(Ira Levin)’의 <로즈메리의 아기(Rosemary's Baby)>는 다시 읽고 싶을 정도로 독특한 해석이 남달랐습니다.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서 양가감정을 해결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조부모들과 함께 하는 확대 가정이나 아버지(남편)들의 역할과 도움은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나아가 출산과 육아에 관한 정부의 공공 서비스, 경쟁 완화와 평준화를 위한 학교 교육의 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것은 양가감정의 영향력이 한 가정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경쟁에 몰렸던 사람들은 자신의 이루지 못한 포부를 대신 이뤄줄 대상이 필요한데, 그 상대가 자식이기 십상이며 그 과정에서 나쁜 방향으로 작동되는 양가감정은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옵니다.


또한 저자는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의도의 이면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사고나 판단이 아닌, 인간으로서 당연한 ‘자기보존’의 욕구로 봄이 옳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약간 위험한 발언처럼 들리는 ‘낙태’에 관한 부분은 사회적인 합의 이전에 그 행간을 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저출산, 노령화 문제 해결을 위해 고심하고 있는 우리의 현재 상황에선 말이죠. 무엇보다 ‘인간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 보이니까요.




독자에 따라 이 저서와 저자의 관점을 ‘성차별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정 내 구성원(자식)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이 ‘어머니’라고 봄으로서, 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이성애 중심의 구태의연한 관점을 고수하며, 가정 내 여러 문제들에 있어서 그 책임을 여성(어머니)에게 전가하는 여성혐오적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니까요. 저자는 양가감정을 말하기 위해 ‘엄마와 자식’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완전히 배제시킵니다. 저자 자신은 ‘아빠가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부족해 보이죠.


더불어 사회구성원의 문제적(범죄적) 행동의 원인을 가정 내,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찾으려는 의도가 공정한가의 의문도 듭니다. 여기에 ‘옥시톡신’이나 ‘테스토스테론’, ‘바소프레신’ 같은 호르몬 이름들이 등장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남성 호르몬이 줄으듬으로 남성성이 사라져야만 아이를 안아주고 놀아줄 수 있다는 과학적 가설은 아이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남자들에게 핑계를 대주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보육은 전적으로 (남성성과는 무관한) 여성의 할 일이라는 것 같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성장과 발달, 생존이 모두 어머니, 혹은 어머니노릇을 하는 사람에게 달렸다.」고 말한 ‘도널드 위니콧(Donald Winnicott)’의 인용은 꽤 적절합니다. 어머니노릇이란 반드시 임신과 출산을 겪지 않아도 되는 동성부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여전히 ‘성역할’이라는 문제는 남지만 ‘어머니노릇’이라는 행위의 주체가 반드시 여성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조손(祖孫)가정에서는 할아버지가, 어떤 경우엔 삼촌이나 고모부도 가능하다면 ‘성차별’이란 단어는 단지 누명에 불과하겠죠. 




출산을 앞둔 엄마들은 물론이고 신혼부부나 결혼을 앞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보육이란 상호적인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부모 역시 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죠.

모든 관계가 ‘윈-윈(Win-Win)’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희생이나 고압적인 강요는 별로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엄마(부모) 역시 자식은 그들의 소유물이 아니며, 자신의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줄 도구도 아니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담을 그릇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엄마 스스로도 ‘누구의 엄마’가 아닌, 고유의 정체성을 지닌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도 필요하고요.


개인적으로, 저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자세로 이 책을 읽었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가 되었어요. 더불어 우리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빌미도 생기더군요. 그런 면에서 부모와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읽어도 좋을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갈등과 원망의 해결은 아니더라도 그것들의 뿌리를 짐작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