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드 시즌; 욕망의 계절_Ende der Schonzeit_2012-리뷰
이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독일과 스위스 국경 부근에서 외딴 농장을 경영하는 ‘프리츠’는 나치를 피해 도망 중이던 유대인 ‘알버트’를 숨겨줍니다. 하지만 대가가 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인 ‘엠마’와는 결혼 십 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었고 프리츠는 성불구였던 거죠. 아내를 임신시켜 달라는 프리츠의 제안으로 세 남녀의 동거는 위험한 치정극으로 치닫습니다.
막장 드라마나 성인 에로영화를 생각나게 하는 설정이지만 영화는 이야기의 피상성과 전형성, 설정의 천박함을 극복합니다. 영화는 세 인물의 심리와 서로 다른 욕망들이 반목하고 협조하며 빚어내는 드라마에 집중함으로서 고급스러운 심리 멜로드라마의 모습을 완벽히 갖춥니다. 섹스, 사랑, 질투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마치 크게 부푼 풍선을 들고 가시나무 숲을 지나는 감상을 남깁니다.
세 인물의 행동은 나름의 이유와 정당성을 갖습니다. 프리츠는 부유한 농장주로서 가업을 물려줄 아들이 절실했고, 시대적 여성상과 가족관에 갇혀 있는 엠마는 남편의 제안을 명령처럼 받아들이죠. 양심적이고 순진한 알버트 또한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을 명목이 필요했고요.
당시의 독일인들에게 기대하기 힘들었다고 여겨지는 이타심을 보여준 프리츠의 욕망은 처음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엉뚱한 제안을 하게 만들고 자신이 치러야 하는 질투라는 대가는 그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남편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던 엠마 역시 아이를 갖기 위해 섹스를 했을 뿐인 남자를 자신이 사랑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겠죠. 알버트 역시 은혜를 갚기 위한 행동이 스스로에게 어떤 행동을 초래할 지 전혀 몰랐을 거고요.
이야기의 진행은 관객의 예상을 크게 뛰어넘지는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 익숙합니다. ‘강수연’이 주연한 영화 《씨받이》나, ‘종녀촌(種女村)’에 관한 우리 설화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단지 주인공의 성(性)과 역할이 뒤바뀌었을 뿐이죠.
인물들의 상황과 처지, 욕망이 이끄는 이야기는 익숙하지만 결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 씨받이나 종녀촌 설화가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한 사회에서 여성들의 인권은 무시되고 짓밟혀 결국 불행해지고 잊혔다면, 영화 속의 엠마는 보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복수’를 합니다. 엠마가 행복해졌다고는 확신할 수 없지만, 최소한 제 감정은 꽤 명확히 드러내니까요.
엠마는 두 남자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그 둘의 관계에 희생되는 희생양, 아이 생산의 도구, 성적인 대상에 불과합니다. 두 남자 모두 엠마의 감정이나 의견 따윈 개의치 않습니다. 프리츠는 물론이고 알버트마저도 엠마를 거부합니다. 프리츠와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어서였죠. 이렇듯 엠마는 무시당하고 버림받고 내팽개쳐집니다.
그런 엠마가 나중에 하는 행동을 보세요. 옳고 그름을 떠나 엠마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신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가장 유효하고 적절했던 행동을 합니다. 물론 ‘전쟁 중의 독일’이라는 배경과 그녀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욕을 먹겠지만, 이전에 한 명의 여성으로서, 자유와 인권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그 행동은 이해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페미니즘’, 혹은 ‘여권’의 관점에서보는 관객들도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그런 관객들에겐 알버트를 피해자로 만들어버린 영화의 태도에 불만이 있는 것도 당연하고요. 그런 시각이라면 엠마는 냉혈한 복수자이면서 치사한 밀고자, 즉 가해자의 역할을 벗어날 수 없어 보이니까요. 엠마라는 캐릭터에게 그런 누명은 무척 억울한 일이죠.
사족
느닷없이 임신한 엠마를 프리츠는 친구와 친척들, 마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려고 했을까요? 자신이 불임이라는 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것 같던데. 게다가 만약 엠마가 딸을 낳았다면?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 짓’을 계속하려고 했던 걸까요?
애당초 프리츠의 아이디어란 게 참으로 무모하고 위험한데다 참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점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니, 세 명 모두 뭔가에 홀렸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