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옆 무덤의 남자_카타리나 마세티-리뷰

달콤한 쿠키 2018. 2. 12. 07:18


얼마 전,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데시레’는 어느새 남편의 무덤을 찾는 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곳에서 농부, ‘벤니’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건 벤니도 마찬가지였어요.




줄거리를 적으려고 보니, 별로 적을 게 없습니다. 이후로 뻔하게 전개되죠.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졌으니 당분간은 알콩달콩할 테고, 적당한 순간에 갈등이 오면 장애가 커지고, 그것들과 싸우다가는 결국...

문제는 결말인데, 가능한 결말 역시 범위가 아주 넓고 다양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이 이루어지거나, 아니거나.

연애소설이란 장르 역시 어떤 공식이 존재하는가 봅니다. 이렇게 뻔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왜 목말라 하는 걸까요.


아마도 ‘사랑’이란 감정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그 소재가 주는 환상 때문인지도 모르고요. ‘백마 탄 왕자님’이나 ‘늘씬한 미녀’에 대한 환상이 아닙니다. 그건 성차별이고요.

사람들이 갖는 사랑에 대한 환상은 ‘관계’에 대한 환상 같습니다. 감정이라고 해야 아무리 사랑해도 길어야 삼 년, 심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석 달, 아니, 사흘이라고들 하니까요.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죠. 아니면 그 감정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더 이상의 감흥은 갖기 어려운 걸 수도 있고요.


하지만 사랑에 기반한 ‘관계’는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했었다면 그 사람과 함께 나눈 평온함, 다정함, 친밀함에 대한 기억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됩니다. 그건 단순히 기억이 아니게 되는 거죠.

이 역시 감정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달리,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다른 감정들은 훨씬 더 다채롭습니다. 증오를 사랑이라고 일컫지는 않지만, 우리는 ‘애증’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알고 있습니다. 그 복잡하고 모호한 감정은 관계를 전제로 해야 경험할 수 있는 거죠.

사랑에 빠진다는 건, 어쩌면 자기 학대의 과정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그 어둡고 외로운 동굴을 깊숙이, 그리고 샅샅이 탐험한 분들은 공감하시리라 믿어요.




연애소설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별로 좋아하는 편도 아니지만, 이 책은 설정이 마음에 들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가 하필 무덤가였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죽음은 끝인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니까요. 보통 죽음은 암울하고 슬프게 다뤄지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남편이 죽음 뒤에 데시레는 어떤 문을 열게 될까요.


이야기는 경쾌하고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시종일관 유머가 흐릅니다. 데시레와 벤니(사랑하는 엄마를 잃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방구석에 틀어박혀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 그런 사람들은 아닙니다. 적당히 쾌활하고 긍정적이고 이해타산이 밝은 사람들이죠. 희생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주장만 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작가는 그 관계의 장애를 두 사람 안에서 불러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건 (어떤 외부의 조건들이 아니라) 두 사람 자체입니다.

두 사람은 속속들이 다릅니다. 데시레는 도시 여자고 벤니는 농부입니다. 데시레 말마따나 같은 하늘, 같은 나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가치관, 생활습관, 취향, 평소에 꿈꿔왔던 이상향까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특히 벤니에 대해서 어떤 독자들은 심한 반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벤니가 원하는 아내란 음식을 하고 농장일을 돕고 집안을 말끔하게 가꿔줄 사람입니다. 냉동식품에 익숙한 데시레는 여러모로 벤니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사람이죠. 이런 벤니의 요구에서 성차별, 혹은 가부장의 모습을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벤니의 죽은 모친이 아들을 위해 했던 일을 생각하면 벤니의 요구는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더군다나 넓은 농장의 모든 일을, 고용인도 없이, 벤니 혼자 해야 하니까요.


이런 부분에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동서양의 관념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결혼을 ‘두 가계의 결합’으로 보는 반면, 서양은 ‘두 사람의 결합’으로 보려 합니다. 데시레와 벤니가 맞는 갈등도 ‘두 가계’가 아닌 ‘두 사람’에게서 오고, 그 갈등의 해결 역시 ‘두 사람’ 자체에게서 옵니다. 이야기의 엔딩을 ‘해결’이라고 할 수만 있다면요.


결말은 약간 아리송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재개된다는 암시일 수도 있고,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챙길 건 챙기라는 말일 수도 있고요. 해결이나 화해라기보다 ‘타협’으로 보이는 엔딩은 약간 아쉽습니다.


각 장마다 데시레와 벤니의 시각을 오갑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두 사람보다 정보가 더 많죠. 독자로서 두 연인은 몹시 귀엽습니다. 서로에게 아닌 척, 하고 있어도 독자들의 눈에는 뻔히 보이니까요. ‘밀당’의 진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두 사람은 적어도 요령 정도는 알고 있는 눈치죠.


작가인 ‘카타리나 마세티(Katarina Mazetti)’는 스웨덴 사람입니다. 작품에 묘사된 복지국가도 우리와 크게 달라 보이진 않습니다. 이 사람들도 매 끼니 뭘 먹을까 걱정하고 노후를 걱정하고 아이들 교육비를 부담스러워 하죠.


어리둥절한 엔딩은 작가가 후속작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가족무덤》이라는 제목으로 데시레와 벤니가 등장하는 다른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출판 예정이었던 모양인데, 어디에도 그 책에 대한 출판 정보는 없네요.




사족


엔딩에 대해 불평을 했는데, 어떻게 보면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엔딩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의 틀에서라면 쾌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결말이지만요. 하긴, 요즘은 또 다를 수도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