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 방의 선물_리뷰
7번방의 선물 (2013)
9.3
글쓴이 평점
지적장애를 갖고 있는 용구는 착실한 가장입니다. 지능이 모자라긴 하지만 직업도 있고, 책임감도 있으며, 무엇보다 딸을 무척 사랑합니다. 그러던 그가 유아 납치 강간이라는 누명을 쓰고 수감되죠. 억울한 일이지만 달리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용구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단지 운이 나빴던 거지요.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더 나아갈 줄거리는 없어요. 교도소 안에서 동료들과 아옹다옹하는 모습들이 그려지고, 자신의 누명을 호소할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리며, 결국 사형이 집행되고 세월이 흘러 용구의 딸, 예승이는 억울한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려고 노력합니다.
관람 전에 상상했던 것과 이야기가 많이 다릅니다. 교도소 안에서의 에피소드를 주로 다룬 휴먼 드라마로 생각했지만, 정작 영화의 목적은 이 나라의 사법부를 꼬집는 데에 있어요. 성의 없는 수사와 얼치기 재판, 얼렁뚱땅 식 형 집행을 비난하는 영화죠. 그 안에 용구-예승 부녀 측의 사람들이 있고요. 그 반대편엔 소위 ‘민중의 지팡이’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영화 속의 그들은 감정적이고 게으르며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분법적 대립 구도 안에서 영화의 메시지는 힘을 얻습니다. 보다 보면 정말 저런 일이 허다하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드니까요.
이야기는 좋은 편입니다. 방향도 확실하고 관객의 허를 찌르는 부분도 많아요. 휴먼 드라마에 코미디를 적절히 섞으면서, 그 안에 사회고발적인 메시지를 드러내는 영민함도 있고요. 취지도 좋고 목적도 좋고... 소위 이 영화와 비슷한 키워드를 갖고 있는 영화에서 시도하지 못 했던 부분들이 많았던 영화였어요.
하지만 영화의 허점은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법에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단점은 드라마가 끊겨요. 코미디의 요소들이 드라마를 방해합니다. 맥이 뚝뚝 끊겨요. 편집의 영향인지, 시나리오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는 코미디를 드라마 안에 잘 녹이질 못 한 시나리오의 탓으로 보입니다.
이런 단점은 이야기의 장점을 파묻습니다. 관객은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 감정을 선택합니다. 그래야만 감정이입이 수월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일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냥 자연스럽게 취해지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끊기는 통에 그게 어렵게 되어 버려요. 그러니 이런 영화가 의도해야 할 페이소스가 생기질 않고요.
인물들의 관계는 어떤가요. 처음의 용구는 그 나쁜 죄질로 재소자들 사이에서도 ‘악마’입니다. 하지만 나중엔 재소자 동료들은 물론이고 교도소장과의 관계에 변화가 옵니다. 문제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 방법에 있어요.
사건 하나 던져놓고 끝. 그러고 나면 용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모두 변해 있죠. 물론 그런 것이 이야기의 공식이기도 하고, 도구이기도 하지만, 도무지 설득이 안 된다는 게 문제죠. 그런 과정의 설득을 영화는 아예 무시합니다. 너무 쉽게 생각하고 안일하게 다룬 거죠. 그러니 개연성도 없고 비약이 심해질 수밖에요.
몇몇 장면들에서는 문제들이 (제가 보기엔) 심각합니다.
교도관 몰래 재소자들이 저지르는 행동들이나 예승이가 교도소 안을 제 집 드나들 듯 들락날락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하지,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서 끊이질 않습니다.
용구가 수감되고 혼자 남겨진 예승이는 보육원 시설에 맡겨집니다. 그런데도 학교에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그건 관행 아닌가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아빠와 함께 교도소에서 며칠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고요. 며칠 후에 나타난 예승에게 담임선생은 어디 갔었어? 이렇게 묻더군요. 말이 되나요?
용구-예승 부녀가 기구를 타고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에서는 영화가 마치 판타지 영화처럼 보여요. 물론 그런 효과를 노릴 수도 있었겠지만, 전체 영화와 어울리나요? 그 장면은 그냥 튀어요.
전체적으로 영화의 디테일들은 무시되고 설명은 아예 생략됩니다. 그냥 얼렁뚱땅 해치우고 마는 거죠. 물론 그런 장면들이 가능한 일일 수도 있고, 영화적 상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디테일들을 원합니다. 잘 모르는 세계이니까요. 판타지적인 장면이라도 그래요. 영화적 상상이 리얼리티를 갖기 위해서 ‘핍진성(verisimilitude)’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건 설명과 설득의 과정을 줄일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수단이기도 하고요.
용구의 마지막 법정 장면도 문제가 많습니다. 아주 중요한 장면이죠. 국면이 반전되고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며 용구의 운명이 뒤집히는 장면이니까요. 하지만 딸의 앞날을 위해 용구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행을 자백하는 데에 동기가 부족합니다. 머리로는 상상할 수 있지만, 그런 행동이 너무 뜻밖인 거죠. 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릴 때까지 용구가 어떤 고민이나 갈등을 했던가요?
클라이맥스에 대해서. 제발 짧게 보여주세요. 울고 짜는 장면이 너무 길어요. 많다는 것이 아니라 긴 게 문제죠. 그런 장면들은 TV 드라마로 충분해요. 러닝타임도 훨씬 짧은 영화에서 그런 신파를 가지고 질질 끌 필요가 과연 있을까요? 오래 보여준다고 감정이 더 처절해지고 절실해지는 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의 질(quality)이고 그 깊이입니다. 왜 눈물 흘리는 장면에 이토록 연연해 하는 거죠? 우리가 ‘한의 민족’이니 ‘눈물의 정서’니, 이런 말들은 소용없습니다. 짧고 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오히려 강한 임팩트를 남기지요.
사족. 용구의 사건이 1997년. 현재의 예승이는 과거, 아버지의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요구한다고 합니다. 재수사와 병행해서 당시 관련 검찰청장과 수사 기관에 대해서 명예훼손이나 간접 살인죄 등등으로 고발이 가능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