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기_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_2019-리뷰

달콤한 쿠키 2020. 3. 11. 06:29


인간의 욕망은 한도 끝도 없어서, 어쩌면 사는 내내 대부분의 시간을 무언가를 원하고 바라고 구하면서 보낸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인간이 불행해지는 원인도 지나친 욕망일 때가 많죠. 그게 아니라면 남과 비교하는 습관이랄까요. 그것도 자기보다 잘난 사람하고 비교하기 쉬운데, 그런 경우 늘 좌절과 실망을 안게 되는 건 뻔한 공식이죠.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마다 각기 다른 욕망을 품고 있을 거라고. 그래서 별의별 희한한 욕구가 생기는 거라고, 그러므로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 거라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 처한 상황에 만족하고 그 안에서 만족을 찾는 게 삶의 진정한 행복을 구하는 방법이라지만, 그 또한 욕망처럼 보입니다. 그러기가 당최 쉽지가 않으니까 말이죠. 그런 게 어디 가능하기나 합니까. 그렇다면, 그런 맥락에서라면, 우리가 갖는 희망, 미래에 대한 꿈조차 욕망의 다른 이름인 걸까요.

 

여기 찬실이란 여자가 있습니다. 나이는 마흔이고 영화가 너무 좋아 거의 평생을 그것에 쏟아부었고, 그렇게 바쁘게 사느라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다시 말하면 사십 년 인생을 별로 즐기지 못한, 불쌍하다면 불쌍하고 멋있다면 멋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다 오래 같이 붙어 일해 온 감독이 급사하자 일이 끊깁니다. 영화판의 생리를 잘 모르니, 감독과 피디의 관계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찬실의 삶에 대한 판단은 관객들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영화는 주인공 찬실을 불쌍한여자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목은 그런 찬실에 대한 풍자입니다. 찬실은 지지리도 복도 없는 여자예요.

 

영화 속의 찬실은 실업은 고사하고 실패를 거듭합니다. 찬실에게 무엇이 문제일까요. 복이 없다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누가 찬실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타고난 복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 말한다면, 찬실은 이쯤에서 손을 털어야 할까요. 영화 전선에서 물러나 다른 직업을 찾던가, 늦었지만 비혼을 선언하고 개나 고양이를 키우든가 그래야 할까요.

 

영화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존재하는 수많은 찬실들에게 용기를 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거죠. 영화는 내내 찬실의 어깨를 다독여줍니다. 꿈을 계속 꾸어도 좋고, 희망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속삭이며, 앞으로 계속 나아가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이라는 불확실한 미래와 희망이 주는 긍정적인 비전이 일종의 마약 같은 거라고, ‘포기의 미덕을 갖추어야 인생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고 말하는 대신, 그냥 계속 하던 거를 하라고, 하던 대로 하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이나 희망은 다른 욕망과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영화의 메시지가 모든 관객들에게 통할 수는 없습니다. 찬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보다 방향을 틀라고 종용하고 싶은 관객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찬실의 행복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면, 그저 묵묵히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지 않을까요. 찬실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선택을 하던 그건 찬실 본인의 삶이니까요.

 

저는 찬실을 복 받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보는 쪽입니다. 돈이 있고 없고, 할 일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 아니, 그것들을 문제로 치고 들어도 찬실은 충분히 행복해 보입니다. 영화판 일이야 프리랜서가 많으니 일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고, 무리한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버는 만큼의 선 안에서 소비한다면 가난하긴 해도 부족하진 않을 거고요. ‘얼펑처럼 들리지만, 외모에 크게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니, 연애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언젠가는 충분히 예쁜 사랑을 할 수 있겠죠.

 

이렇게 적고 보니, 제목이 더 이상 찬실에 대한 풍자로 읽히지 않습니다. 찬실이는 정말 복이 많은 편입니다. 차고 넘치지는 건 오히려 결핍에 가까우니, 경계해야 하죠.

 

영화의 만듦새는 썩 그리 좋지는 못합니다. 방점이 없는 이야기는 관객들을 다소 피곤하게만듭니다. 단편으로 만들어도 될 이야기를 장편으로 억지로 늘인 느낌도 나고, 약간 지루하다는 뜻이죠. 하긴, 극적인 순간을 위해 드라마틱한 전개를 노렸더라면 지금의 현실감이 희석됐을 테고, 그럼 이 영화의 목소리가 남기는 울림도 크지는 않았을 테니. , 얻은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을 테죠. 무엇을 놓고 무엇을 잡을지는 만든 사람들의 선택이고 말이죠.


영화의 결말을 보며 관객들은 찬실이 계속 keep going하리란 예상을 할 겁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건 결말인데, 영화는 찬실을 홀로,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찬실의 주변에 소수이지만 진정한 친구들을 둠으로서, 영화는 우리의 주인공을 응원합니다.

펭수의 말마따나 힘든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은 위로가 안 됩니다. 사랑이건 우정이건, 아니면 동지애건,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감정이 사랑해라는 말을 대신하겠죠. 힘들고 외로운 삶에 그보다 더 큰 힘이 어디 또 있으려고요.

 

 

사족

 

노아 바움벡(Noah Baumbach)’ 감독의 2012년 작, 프란시스 하(Frances Ha)와 비슷한 점이 아주 아주 많습니다. 제가 아는 누군가가 김초희감독의 이 영화와 노아 바움벡 영화 사이에서 고민한다면, 저는 어떤 영화를 권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