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습니다, 한국어_라기엔-리뷰
저자도 적고 있듯이 ‘한글’과 ‘한국어’는 다릅니다. 전 세계엔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영어’라고 일컫지는 않죠. 한글은 한국인들의 언어생활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한국어는 언어 이상의 의미를 갖는데, 한국인들의 문화와 생태, 역사, 관습, 정체성 같은 정신 기제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세계 어느 언어나 마찬가지겠죠. 그러므로 타국의 언어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구사하기 위해서) 사용자들의 문화를 함께 배워야 한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닌 게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국어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라 교육받고 거의 평생을 살아온 대부분의 우리들은 우리의 언어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굳이 우리의 문화나 관습, 정체성 같은 것들을 (일부러 그러지 않는 한) 새삼 문제 삼을 필요가 별로 없기 때문이죠. 우리의 몸처럼 당연하게 여겨지는 한국어는 친숙한 만큼 우리들에게 더 생소하고 어렵습니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그런 사실을 각성시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호기심이 많아 보이는 저자는 한국어에 대해 평소에 가졌던 의문과 궁금증에 대해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탐색하여 얻은 나름의 결과들을 펼쳐 보입니다. 저자가 던지는 의문들은 꽤나 도전적이지만 다소 터무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았던 한국어는 저자의 의심 많은 뇌세포들을 통해 통찰력 있는 화두로 독자들 앞에 섭니다. 어떤 주제들은 철학적이기까지 한데, 독자들은 저자가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에 동참하면서, 살면서 단 한 번도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던 모국어에 대해 비로소 사뭇 진지한 태도를 취합니다.
사색가들이 거의 그렇듯 머릿속의 생각을 실패 풀 듯 줄줄 풀어놓은 결과는 다소 산만합니다. 이 책을 독파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들 중의 하나인데, 저자는 종종 본인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본래 의도의 맥을 놓치기도 합니다.
이 책을 어렵고 따분한 문법책으로 대하는 독자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한국어에 대한 수다로 일관한 에세이로 소비하기 쉽죠. 그렇게 읽히는 이유는 ‘사실’보다는 ‘추론’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주장은 꽤 강하지만 ‘과연 그럴까’라는 의심을 무색하게 만드는 데엔 역부족입니다.
그러므로 표지에 적힌 ‘뻔하지 않게 뻔뻔하게 읽힌다’는 태그라인은 이 책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뻔하지 않은 주제를 뻔하지 않은 논조로, 마치 절대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뻔뻔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유들유들한 어투도 한몫하고 그 주장이 굉장한 설득력을 갖고 있기는 해도, 그것들이 정확하고 전문적인 언어학적 지식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을 대하는 독자들이 유념해야 할 사항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자의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무척 고무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모국어에 대해 한 번 정도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도록 만든다는 겁니다. 더불어 우리의 생활 전반에 걸친 우리의 언어 습관을 돌이켜보고 숙고하도록 동기를 주며, 나아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국뽕’이 아닌, 진정한) 애국심을 적극적으로 찾도록 해준다는 데에 있을 겁니다.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하며 (요즘 들어 특히 더욱) 변질된 ‘보수’의 모토가 되어 버린 것 같은 ‘애국’이라는 단어에 닭살이 돋지만 그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겁니다.
단지 우리가 상용하는 언어에 대한 수다를 읽었을 뿐인데, 그래서 모국어에 대해 평소라면 상상도 못했을 생각을 책 한 권 읽는 동안만 잠깐 했을 뿐인데, 난데없는 애국심이라니. 기이한 경험임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스승의 날’로 알고 있는 5월 15일은 (여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라고 합니다. 은사님들께 감사를 전하는 건 물론이고, 더불어 세종대왕님의 위대한 업적을 한 번 쯤 기려보는 것도, 이 책을 읽은 이후로는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족
세종대왕의 탄신일에 대한 다른 주장은 이 기사를 통해 읽어보세요.
http://www.sejongnewspaper.com/sub_read.html?uid=18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