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봄에 나는 없었다_메리 웨스트마콧-리뷰

달콤한 쿠키 2020. 10. 6. 07:09

조앤 스쿠다모어(Joan Scudamore)’는 남들에게 꿀리지 않는 모습으로 늙어가는 중년의 여성입니다. 조앤은 쉰을 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교양 있고 기품이 흘러넘치는 태도와 취향, 삶의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조앤은 나름대로(사실은 꽤)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편입니다. 남편, ‘로드니는 훌륭한 변호사이고 자녀들 역시(어느 자식들이 그렇듯), 한때 부모의(특히 엄마인 조앤의) 속을 약간 썩이긴 했지만 결혼도 하고 자신들의 분야에 나름 성공적으로 정착도 했죠. 남은 것이라고는 이제 행복하게, 그리고 여유 있고 품위 있게 늙어가는 일 뿐입니다.

 

그러던 조앤은 막내딸 바바라의 병문안을 위해 바그다드에 들렀다가 영국으로 오는 길에 발이 묶입니다. 좋지 않은 날씨와 당시의 철도 사정(때는 40년대)으로 사막에서 고립된 거죠.

철도는 열릴 기미도 안 보이고, 주변에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곤 말이 통하지 않는 인도인 숙소 매니저와 아랍인 심부름꾼 소년들 몇 명뿐인 사막 한 가운데에 던져진 조앤은, 가져온 책도 다 읽고 소일거리도 없게 되자 슬슬 불안해집니다. 숙소엔 물론 그럭저럭 편안한 잠자리와 먹을 것도 풍부해 나름 안전한 생활이 보장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할 일이라고는 생각뿐인 상황에서 조앤은 그 생각이란 걸 하기로 합니다. 무엇에 대해서?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데에 남편과 자식들이 빠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조앤은, 혼란과 고통으로 자신을 온통 흔들어 놓는 어떤 결론에 다다르고 패닉에 빠집니다.

 

설정이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단순합니다. 조앤이 맞닥뜨린 상황은 조앤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변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관찰하며, 스스로를 온전한 모습 그대로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일종의 장치입니다.

조앤이 며칠간의 고독과 무위(無爲), 회상을 통해 마주한 것은, 자신이 얼핏 유복해 보이는 겉보기와는 달리, 불행과 위선과 독선으로 가득 찬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조앤은 남편도 자녀들도 친구들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외감과 외로움, 그리고 자신 역시,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그들을 단 한 순간도 행복하게 해주질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립니다. 그 중의 최악은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이죠.

 

조앤을 단순히 속물이거나 세속적인 인간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조앤 자신이 스스로의 욕구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조앤의 입장에서라면 그 자신의 욕구는 나름 정당합니다.

하지만 그건 균형의 문제입니다. 조앤은 자신의 기준을 강요함으로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타인들조차 불행으로 몰고 갑니다. 하지만 조앤 자신에겐 최선이었던 것들이 남편과 자녀들에겐 그렇지 않았음을 깨닫고 조앤은 무너집니다. 과거를 돌이키고 싶지만 방법이 있을까요.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남편 곁으로 돌아가면 속죄하고 태도를 바꿔 다른 사람의 최선에 대해서도 생각하자고 결심하지요.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일까요?

 

결국 철길은 다시 열리고 조앤은 영국의 남편 곁으로 돌아가지만 결코 변할 수 없었습니다. 조앤은 잠깐 동안의 깨달음을 한낱 몽상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자신이 사막 한 가운데에서 목격했던 신기루처럼요. 그런 조앤을 향한 남편의 동정은 무자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회상을 통한 주인공의 심리, 행간에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의미심장한 대화, 아기자기한 멜로드라마적 재미가 쏠쏠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안엔 인간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섬세한 복선과 치밀한 심리 묘사, 아기자기한 일상의 디테일 등을 통해 드러납니다. 어쩌면 이는 작가가 인간을 관찰한 결과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꿰뚫어본 결과로 보입니다. 작가의 혜안이 돋보이는 심리묘사가 무척 날카로운 작품입니다. 작가는 주인공 조앤을 통해 독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만큼 타인의 마음의 외침에도 귀를 기울이라는 조언을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메리 웨스트마콧(Mary Westmacott)’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세 번째 작품입니다.

작가가 위의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들은 멜로드라마 성격이 강한 심리소설에 가까운데, 작가는 그 특유의 구성력과 긴장감을 쌓아가는 솜씨로 단순한 이야기를 무척 흥미진진하게 풀어냅니다. 이 작품 역시 클라이맥스로 다가가면서, 독자들은 조앤의 깨달음과 더불어 심리적인 쾌감과 부담을 떠안게 되는데, 그 부분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이 상당합니다. 그리고 허무하고 무자비한 엔딩은 크리스티가 자신의 다른 추리소설에서 보여준 의외의 결말과도 같은 서스펜스를 보장합니다. 무척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엔딩에서 조앤의 변화를 기대했던 독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작가는 조앤을 원래 그대로의 조앤으로 되돌려놓습니다. 마치 아무리 스스로 변하려고 노력해도 그 변화가 결코 쉽지 않은, ‘생긴 그대로, 주어진 제 그릇대로 살아야하는인간의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은 작가가 작품을 통틀어 그 안에서 일관되게 그려온 인간들의 모습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면 뒤에 숨기고 있는 진실은 어쩌면 그런 모습일지도 모르겠어요.

 

사족

 

원제인 <Absent in the Spring>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98, ‘내가 그대에게서 떠나 있던 때는, 봄이었노라(From you have I been absent in the spring)’의 인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