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리면_헬렌 라일리-리뷰
모종의 이유로 가족과 연을 끊고 살았던 ‘이브’는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전하러 오랜만에 가족을 방문한다. 아버지나 오빠 부부, 이복동생 ‘나탈리’는 그녀를 반기지만,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인 이모, ‘샬롯’은 여전히 이브를 냉대한다. 이브가 예상했던 일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가족 내의 복잡한 면면이 드러난다. 온 가족이, 죽은 모친으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나탈리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했던 것. 이브가 집을 떠난 이유도 동생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나탈리와 정혼 관계에 있는 ‘브루스’는 이브의 옛 연인이었다.
자정 즈음의 공원에서 샬롯이 총에 맞아 사망한다. 명백한 살인이다. 경찰이 개입되고 감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얽히고설킨 가족들의 비밀이 하나 둘 드러난다. 깊은 밤, 이모는 공원에서 누구를 기다렸던 걸까. 그리고 살인자는 누구일까.
전형적인 ‘후던잇(Whodunit)’ 스타일이다. 인물들과 무대가 소개되고 범죄의 조짐을 보여주는 초반을 지나면 살인이 나온다. 수사가 시작된다. 용의자가 나열되고 단서가 제공된다. 독자들이 범죄의 증거들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게 해야 능숙한 작가다. 범인은 마지막 순간에야 정체를 드러내는데 의외의 인물이다. 범인의 정체, 범죄의 동기, 수단 등이 독자들의 허를 찌를수록 ‘잘 쓰인’ 추리소설이라고 여겨진다.
이 작품은 잘 쓰였다. 범죄도 잘 짜였고 이야기의 얼개도 보기 좋다. 범인의 정체나 범죄의 동기도 적당한 곳에 잘 숨겨져 있다. 특히 초반의 20여쪽 안에 그 많은 인물과 복잡한 무대를 효과적으로 소개하는 솜씨는 장인의 것에 가깝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가 이 작품보다 12년 전에 발표한 ≪엔드 하우스의 비극(the Peril at the End House; 32年 作≫을 연상하게 되는 부분이 있지만, 나름의 오리지낼리티를 갖고 있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다. 긴장감도 좋아 결말 즈음에 이브가 위험에 빠지는 부분에선 가슴이 ‘쫄깃’해진다.
문제는 잘 쓰인 소설이지만 ‘훌륭한’ 소설이 되기엔 다소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단 이 작품엔 범죄와 그 해결이라는 추리소설의 골자만 두드러진다. 드라마의 요소가 충분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잘 활용하지 않는다. 작가가 일부러 멜로드라마 같은 말랑함을 지양하고 있는 느낌이다. 로맨틱한 분위기나 인물들의 사변적인 요소는 이 장르 특유의 냉랭함과 상충하기 쉽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희생할지는 작가의 몫이다.
그런 이유로, 작품에 인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범죄의 폭로 이후에 인간성을 고찰할 겨를이 없다. 훌륭한 소설 작품은 그런 기회를 제공한다. 추리소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곧 감동이나 여운으로 남는다. 좋은 커피가 혀 위에 향기를 오래 남기듯, 좋은 소설도 그렇다.
미국에서 44년 첫 출간된 작품이다. ‘추리소설의 황금기’를 함께 한, 그것도 꽤 활발히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인데 지금의 독자들에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작가는 이 책에 나오는 맨해튼 살인 수사반의 수장, ‘크리스토퍼 맥키 경감(Inspector Christopher McKee)’을 주인공으로 서른 편이 넘는 장편추리소설을 발표했다.
‘키멜리움’이라는 출판사에서 몇 년 전부터 ‘잊힌 클래식 추리소설의 재발굴’이라는 취지로 선보이는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목록 중엔 ‘안톤 체홉’의 작품도 있는데, 아주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시리즈의 목록이 길어지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