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명의 화자가 교대로 등장한다. ‘테드 배너먼’, ‘로런’, ‘올리비아’, 그리고 ‘디디(딜리일러)’, 기타 등등.
외딴 집에 직업도 없이 칩거하다시피 살고 있는 테디는 어떤 일에든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에 힘들어 보이고, 어린 딸 로런과 함께 올리비아라는 고양이를 키우고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몇 안 되는 이웃들은 테디의 딸과 고양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 옆, 니들리스 거리의 마지막 집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 온다. 11년 전, 가까운 캠핑장 호숫가에서 사라진 ‘막대아이스크림을 든 소녀’의 언니인 디디는 동생의 행방과 실종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를 좇고 있다.
처음 몇 장(章), 대략 60쪽을 지나면 다양한 화자들이 실제로는 한 인물임을 의식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질문한다. 작가가 지금 ‘다중인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이거 혹시 스포일러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틀리다’는 말이 왠지 공정하지 않게 들리는데 이야기는 시종일관 다중인격(책에서는 ‘해리성정체감장애(DID: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에 시달리는 남자 얘기를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학대’와 그 파괴적인 영향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DID가 소설에서 공포를 자아내기 위한 장치로 소비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나의 일천한 경험으로 보자면 이 증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학대에서 살아남고, 이 증상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선(善)을 위해 분투한다.(512쪽)❞
작가의 이런 의도, 증상에 대한 이해, 오해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이 책의 내용이고 목적이고 그 전부다.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암울한 정서는 공포라기보다 외로움에 가깝다. 테디의 비밀스러운 삶은 충분히 의뭉스럽지만 그 속을 알고 나면 그런 시선이 단지 편견이었음을 알게 된다. 룰루의 실종과 테디의 이야기는 하나로 통합되어 전체를 이룬다. 테디를 의심하고 괴물로 인식했던 디디는 스스로가 괴물이 된다. 한 사람의 오해는 무시되거나 설득의 여지가 있지만 대중의 오해는 하나의 거대한 벽이다. 이 작품은 범죄와 비밀, 거짓말과 두려움, 공포와 혼돈으로 가득차 있지만 결국 ‘선의(善意)’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가 들인 노력은 작가란 직업이 앉아서 얻어먹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읽고 조사하고 쓰는 육체적인 노동은 물론이고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 꾸준히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탐색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난한 길이다. 이 작품이 주는 정서적인 충격은 작가의 의도를 알게 되면 더 큰 울림을 남긴다. 평소에 책 말미에 실리는 ‘작가의 말’ 따위 왜 필요한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런 작가의 말이라면 꼭 필요하고 읽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와 독자의 소통 공간은 ‘작품(이야기)뿐, 그 이상은 안 돼’라는 고집에 약간 여유를 두기로 한다.
시작과 더불어 1/4 분량은 몰입이 약간 어렵다. 한 명이면서 여러 명인 목소리가 서로 다른 기억과 경험들을 동시에 떠들어대는 통에 눈도 머리도 어질어질하다. 하지만 그 지점을 넘어가면 이야기에 빨려들 듯 흡수되는데 그 속도감이 장난이 아니다.
현실을 기반으로 환상 속 자아들이 쏟아내는 초현실적 이야기, 이미지들엔 장단점이 있다. 충분히 흥미로운 반면 인물의 이해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500쪽 넘게 헤매고 다닌다는 점에서 지루한 면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야기 전체에 대한 실제적이고 실속 있는 단서들을 찾는 재미가 독특하다. 마치 엉킨 실타래의 실마리를 찾는 느낌, 혹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느낌이랄까. 이런 장르의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만한 요소다.
사족
원제는 ≪The Last House on Needless Street≫.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72년 영화, ≪The Last House on the Left≫를 생각나게 하는데, 내용은 크게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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