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242

아일린_오테사 모시페그-리뷰

주인공 ‘아일린’은 잘 만들어진 캐릭터다. 소설 작법 책의 캐릭터 챕터에서 다룰 만한 인물이다. 동정도 가고 연민도 간다. 동시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어떤 부분에선 혐오에 가까운 감정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그녀가 살아온 인생이나 당장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빨리 벗어나라고, 혹은 당장 그만두고 네 인생을 살라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이 작품은 캐릭터 소설이면서 (약간 다른 의미의) 성장 소설로 읽힌다. 아일린은 시한폭탄 같은 인물이다. 이 소설이 갖는 재미와 매력의 80퍼센트는 모두 이 인물에게서 비롯된다. 작가는 아일린이란 인물을 도구로 독자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데, 이 인물을 무척 전략적으로 사용한다. 인물에게서 비롯된 긴장은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이야기의 반이 지나도록 작..

꽃을 읽기_책 2025.06.08

나의 사랑, 매기_김금희-리뷰

나 자신이 그다지 보수적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고, 스스로도 사랑에 개방적인 터라 어떤 연애 도, 그것이 제 아무리 파격적이라고 해도 긍정하고 인정할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유독 반감이 드는 형태가 있는데, 그건 바로 ‘불륜’, 혼외의 사랑이다. 이 짧은 소설은 ‘재훈’과 유부녀 ‘매기’의 사랑을 그린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 연인이었지만 그 사랑은 콜라 김 빠지듯 싱겁게 끝났다. 그리고 한참 후에 두 사람은 우연히 재회하고 다시 사랑에 빠진다. 매기는 여자의 본명이 아니다. 재훈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그녀의 본명은 숨겨지지만 정체까지 미궁인 건 아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직 독신인 재훈과 어엿한 남편을 둔 매기의 사랑 역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재훈은 이야기 초반에 둘의 관계가..

꽃을 읽기_책 2025.06.08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_헤르타 뮐러-리뷰

하나의 커다란 모자이크 화(畵) 같다. 영화로 말하자면 몽타주(montage)로만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몇 명의 중심인물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주인공이 아니다. 주변에 많은 인물들이 등퇴장을 반복한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하는데 그걸로 서사화 시키지 않는다. 단발성 에피소드로 끝나는가 싶지만 그건 또 아니다. 이런 저런 일들이 모여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든다. 지류들이 모여 강을 이루는 식이다. 그래서 줄거리를 소개하는 게 쉽지 않다. 일반의 소설 독자들에게 익숙한 소설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한 명, 혹은 다수의 주인공이 나와 그, 혹은 그들이 겪는 문제를 제시하고 사건을 진행하고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결말을 맺는, 그런 소설의 모양새에 편안함과 재미를 느끼는 나 같은 독자에겐 다소 괴상하고 ..

꽃을 읽기_책 2025.06.08

푸른 들판을 걷다_클레어 키건-리뷰

일곱 편의 (중)단편들이 실려 있다. 가족 내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작별 선물>은 임팩트가 꽤 세다. 딜레마에 빠진 피해자와 가해자, 동조자, 방관자 모두를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배치한다. 작가는 주인공을 ‘당신’으로 지칭함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녀 자신’이 되어 보라 종용하며, 이런 고통을 당신이라면 견딜 수 있는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묻는다. 호소력이 상당하다. 단순한 장면이면서도 모호하게 처리한 결말은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한 듯 보인다. 푸른 들판을 걷다>의 주인공인 사제도 딜레마에 빠진 인물이다. 그는 사제인 동시에 보통의 욕구를 지닌 남자다. 그는 ‘둘 다다. 둘 중 하나만일 수는 없는(38쪽)’ 인간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얼룩이 묻기 쉬운 흰 옷(45쪽)’을 입은 사제로 본다. ..

꽃을 읽기_책 2025.05.26

고독한 곳에_도로시 B. 휴즈-리뷰

게으른데다 의지도 없는데 눈만 있는 대로 높아진 한량의 범죄 이야기다.이렇게 적으면 단순하고 뻔한 이야기 같은데, 주인공의 심리를 들여다보면 그 양상이 좀 복잡하다. 일단 주인공인 ‘딕스’는 과거의 참전 용사였다. 군인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군대로부터 방출을 당하자 어쩔 줄 모른다.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현실에 적응하기에 실패한다. 우왕좌왕하던 시기에 사랑하던 여자한테서 배반을 당하고 여성 혐오까지 생겼다. 딕스의 장점은 얼굴 반반한 것밖에는 없다. 몸을 움직여 돈을 벌고 싶지는 않고, 부자 삼촌에게 경제력을 의지한다. 부자 행세도 점점 어려워진데다 가난하고 야심이 큰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딕스의 가장 큰 동기는 부자가 되고 싶은 열망이다.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생활..

꽃을 읽기_책 2025.05.26

단어가 품은 세계_황선엽-리뷰

다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다 보면, 그 나라의 문화나 풍습 등이 자연스럽게 익혀지게 된다.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겠지만 겉핥기는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의 언어를 잘 하는 게 목표라면, 그 나라의 문화나 풍습을 접하려는 노력을 함께 한다면 언어 습득이 보다 수월해지는 경우가 있다. 현지 생활 경험이 외국어 습득에 크게 도움이 되는 건, 물론 언어 사용의 빈도가 훨씬 많아지는 것도 있지만 그들의 삶에 스며든 문화나 철학 등을 알게 될 기회도 많아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우리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태어나면서 말하고 배운 생활어라, 한국어에 밀착되어 있는 우리로서는 우리말에 그다지 깊이 알고 싶은 마음이 거의 없다. 마치 공기의 존재를 거의 모르고 지내는 것처럼. 우리가 굳이 한국어..

꽃을 읽기_책 2025.05.26

파선_요시무라 아키라-리뷰

이야기를 꿰뚫는 정서는 핍박함이다. 절박한 궁핍과 오로지 자연에 의지해야 하는 경제상황, 과학적 사고와는 한참 떨어진 미개한 사고. 외딴 섬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고가 곳곳에 묻어난다. 마을 사람들의 피 말리는 가난과 육지에 하인으로 팔려가는 생활을 벗어나는 길은 난파된 화물선이 바닷가에 나타나는 것뿐이다. 난파선의 화물로 마을 주민들은 아주 잠깐의 경제적 여유를 맛본다. 이야기에서 가장 끔찍한 건 주민들이 난파선을 마냥 기다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나쁜 기상에 배들이 난파되기를 ‘유도한다’. 난파된 배에 생존자가 있다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결말의 불행은 어찌 보면 자업자득, 인과응보의 측면에서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살인자이고 약탈자이다. 잘못된 프로파간다가 대중을 현혹시키고 그릇된 행..

꽃을 읽기_책 2025.05.26

시골 소녀들_에드나 오브라이언-리뷰

서로 왜 붙어 다니는지 전혀 알다가도 모를 두 여자아이가 시골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뒤, 수녀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들어갔다가 사고 쳐서 쫓겨나고 도시에서 직업도 얻고 사랑에도 눈을 뜨고 이런저런 실패를 겪으며 성장하는 이야기. 말은 ‘성장’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아이들이 (나이 먹는 거 빼고) 어떤 면에서 성장을 이뤘는지 공감이 별로 안 된다. 핑계를 굳이 찾자면, 이 책은 캐슬린과 브리짓을 주인공으로 한 3부작의 첫 권이다. 작가가 노렸던 ‘성장’의 진정한 의미는 세 권을 모두 읽어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책만 보자면 뭔가 심심하다. 발표 당시, 자국인 아일랜드 내에서는 상당한 반향을 부른 작품이라고 한다. 불온하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하는데, 십대 여자아이와 성인 남성의 사랑을 묘사한..

꽃을 읽기_책 2025.05.24

하마터면 깨달을 뻔_크리스 나이바우어-리뷰

이 책에서 저자의 주장을 총괄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 당신 자신은 아니라는 사실.(177쪽)❞ 말인 즉, 너는 네가 생각하는 너도 아니고 남들이 생각하는 너도 아니라는 것. 저자의 모든 주장은 여기서 출발한다. ‘나 자신’은 우리가 여태껏 믿어왔던 방식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그건 그저 습관이나 관습에 의한, 나에 대한 생각을 나로 착각하는 것뿐이다. 스스로 믿는 자아상과 동일시할수록 사는 게 버거워질 뿐이며, 행복과 평화를 추구하는 길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29쪽)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아닌 다른 뭔가가 되기를 바라는 바로 그 순간에 분열이 시작(246쪽)되는데, 저자는 이를 ‘긴장’..

꽃을 읽기_책 2025.05.24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_김엄지-리뷰

중심인물인 E는 직장인이다. 쉬는 날엔 집 근처 산책도 나가고 가끔 등산도 하는 것 같고 빨래 걱정을 하는 걸 보니 집안일도 적당히 신경 쓴다. 직장에 나가면 대놓고 졸고 점심도 꼬박꼬박 잘 챙겨 먹는다. 퇴근 후엔 동료들과 술잔도 기울이고 안주 고르는 데 가격이나 가성비 따위 크게 따지지도 않으니 경제적으로도 큰 압박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 내내 비가 내리고 집안의 곰팡이가 신경 쓰이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비 맞고 신발 젖는 게 싫으면 우산을 쓰거나 장화를 신으면 되고 곰팡이가 귀찮으면 팡이 제로를 뿌리거나 방수 공사를 다시 하거나 최소한 도배를 다시 하거나, 그래도 정 안 되면 다른 집으로 가면 되는데, 이런 설정은 일종의 장치로 보인다. 주인공을 점점 잠식하고 숨 막히게 만드는..

꽃을 읽기_책 2025.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