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소설 16

렉싱턴의 유령_무라카미 하루키-리뷰

여행을 떠난 친구의 집을 봐주는 화자가 한밤중에 유령들을 목격하는 이야기인 렉싱턴의 유령>은 일종의 괴담이다. 소위 ‘유령 이야기’로 알려진 다른 괴담들과는 차이가 있는데 유령은 그냥 유령일 뿐이라는 것. 그들에게 있음직한 대단한 사연이 소개되는 것도 아니고 혼이 빠질 정도로 비명을 지르는 주인공도 없다. 화자는 그저 유령들이 그들만의 시간을 갖도록 제 존재를 감춘다. 특이하다면 특이한 이 작품에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읽힌다. 그럴 필요가 없다면 굳이 코를 들이밀지 않는 타인과의 거리감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읽었다. 녹색 짐승> 역시 괴이한 존재가 등장한다. 땅 속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녹색의 생명체는 주인공의 머릿속 생각을 읽는 능력을 가졌을 뿐, 악의라고는 전혀 없어 보인다. 남편이 일하러 나가고 텅..

꽃을 읽기_책 2025.04.30

에고이스트_다카야마 마코토-리뷰

일단 흔한 ‘퀴어 로맨스’에서 벗어난 점에서 무척 새로웠다. 이 이야기는, 뭐랄까…, 사랑의, 사랑에 대한, 사랑을 위한, 사랑에 의한 이야기랄까.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 폭과 층위가 넓고 깊다. 두 명의 연인, 그리고 두 명의 엄마. 시작과 끝, 그리고 끝에서 비롯되는, 마치 화재로 폐허가 된 땅에서 움트는 새싹처럼힘과 생명력을 갖춘 이야기였다. 책의 마지막 장 이후엔 어떤 이야기가 진행될지 궁금해졌다. 화해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로도, 받아들임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힌다. 단순히 외로운 개인과 개인의 사랑 이야기에서 벗어나 (아마도 이조차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보다 높고 넓은 무언가가 그 위에 있음을 작가는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고 감동적이게 보여준 것 같다. 영화도 있다..

꽃을 읽기_책 2025.04.28

버터_유즈키 아사코-리뷰

결혼 어플을 통해 만난 남자들을 만나 돈을 갈취한, 소위 ‘꽃뱀’ 범죄의 피의자로 기소된 ‘가지이 마나코’. 가지이의 범죄가 더욱 유명세를 탄 건 남자들이 몇 명 죽었기 때문이다. 돈을 빼앗고 필요가 없어진 남자들을 죽인 걸까. 아니면 자연사? 사고사? 잡지사 기자인 ‘리카’가 독점 취재를 위해 가지이의 사건에 뛰어 들지만, 리카는 눈앞의 가지이가 ‘아름다운’ 사람이 아닌 데에 놀란다. 커다란 체구에 살집 풍부한 몸매는 일반적인 여성성과 거리가 먼, 성적 매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이 남자들을 꼬드겼다고? 드러나지 않은 게 더 있음을 직감한 리카는 가지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의문의 범죄가 등장하고 의뭉스러운 용의자와 의욕적인 탐정이 잇따른다. 명목상 미스터리의 외피를 쓰고 있으니 잘 어..

꽃을 읽기_책 2025.04.27

거짓의 봄_후루타 덴-리뷰

‘도서(reversed) 미스터리’ 성격의 작품이 다섯 편 실려 있다. 범죄 수사 집단의 주요직에서 동네 파출소의 일개 경찰로 좌천된 ‘가노’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작가가 지향한 장르가 미스터리이니 이 인물이 소위 ‘탐정’인 건 맞는데, 주인공의 역할에선 살짝 비껴 있다. 이야기를 이끄는 실제 주인공들은 각각의 악의를 지닌 인물들처럼 보인다. 작가는 범죄와 수사로 연결되는 미스터리의 전형성에서 벗어나 인물들의 ‘사연’에 집중한다. 도서 미스터리 장르의 특징을 잘 활용한 셈인데, 그래서인지 ‘죄의 고발’보다는 인물들에 대한 연민과 이해에 집중한다. 범죄자들의 편에 서려는 것처럼 보여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전체적으로 추리소설의 작법을 활용한 ‘그냥’ 소설에 가깝게 읽힌다. 사실, 추리 장르로서..

꽃을 읽기_책 2025.04.27

밤의 소리를 듣다_우사미 마코토-리뷰

❝무엇이든 팝니다. 삽니다.각종 고민 상담 및 의뢰 환영.❞   허름한 외관에 이름이 ‘달나라’인 가게는 중고 물품을 사거나 팔면서 자질구레한 심부름도 맡는 그런 곳이다. 그 장소를 배경으로 세 인물이 등장한다.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온 18세의 ‘류타’, 달나라의 숙식 종업원인 ‘다이고’, 그리고 그곳의 사장인 인색하고 괴팍하지만 어딘가 인간미 있는 노파 ‘다카에’. 류타와 다이고가 만나 친구가 된 하로노부 야간 고등학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다.  연작 형식의 장편이다. 세 개의 개별적인 에피소드가 존재하고, 그것들이 곧 하나의 커다란 사건을 이룬다. 이야기의 뼈대이자 대미를 장식하는 사건은 바로 십여 년 전, 동네에서 발생했던 일가족 살인 사건. 당시 유일한 생존자였던, 가족의 어린 아들의 행방은..

꽃을 읽기_책 2025.01.25

신앙_무라타 사야카-리뷰

여섯 편의 단편과 에세이 두 편이 실렸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표제작인 신앙>이다.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 한몫 잡으려는 인물과 그를 의심하면서 서서히 동조하게 되는 다른 인물을 통해 종교(믿음)의 본질을 살핀다. 누군가 마음의 평화와 구원을 얻는다면 사이비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위험해 보이나, 사실을 알고 보면 거대 종교 역시 사이비의 성질을 갖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취향, 물질에 대한 애호의 속성 역시 (사이비) 종교가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것과 비슷하다는 작가의 주장에도 공감이 간다. 틀에 박힌 사고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기발한 전개, 아이러니 가득해 어이없는 웃음이 절로 터지는 결말이 인상적이다. 기회가 된다면 이 작품만은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꽃을 읽기_책 2024.12.04

고양이를 처방해드립니다_이시다 쇼-리뷰

거지같은 분위기의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직장인. 입바른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동료가 꼴 보기 싫은 직장인. 생활에 지쳐 아이들에게 공감을 못 느끼는 엄마. 자신의 완벽주의로 피곤한 사업가. 잃어버린 고양이를 아직 잊지 못하는 여자.  교토 시 번화가, 찾기도 어려운 틈새 골목, 막다른 끝의 건물 5층. 간판도 없고 대기 환자도 없고 의사 한 명(니케)에 간호사 한 명(지토세)이 있는,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고코로 병원’에 갖가지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사실 이 곳은 (그렇게 소문이 났을 뿐) 정신과 클리닉도 아니고 상담소도 아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나설 때 고양이 한 마리씩을 들고 나오는데, 그게 바로 의사의 처방이다. 그렇게 고양이와의 뜻밖의 동거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자신이 서서히 변화..

꽃을 읽기_책 2024.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