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코’와 ‘시오리’, ‘이네코’, ‘사나에’, ‘기누에’는 70년대 일본 청소년들을 열광하게 했던 만화, <푸른 눈동자의 잔> 팬클럽의 간사들입니다. ‘푸른 6인회’라고도 불리는 이 간사직 모임은 그 안에서는 꽤 중요한 직책으로, 여기에 ‘가브리엘’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인물이 최근에 추가됩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각각 ‘에밀리’, ‘실비아’, ‘미레유’, ‘지젤’, ‘마그리트’라는 닉네임으로 불리죠.
특이한 건 이들이 중년이라는 점입니다. 나이 들어 갑자기 팬이 되어 뒤늦은 ‘덕질’을 하는 건 아니고, 이들에겐 이미 삼사십 년 전, 소녀 시절에 빠져들었던 만화에 대한 향수와 추억이 있었던 겁니다. 정기적으로 모임도 갖고 코스플레며 회지 발행 등등을 하는 것을 보면 꽤나 열성적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들에게 <푸른 눈동자의 잔>이란 만화는 거의 종교에 가깝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과거, 만화의 영향력이 이들에게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팬클럽이나 푸른 6인회가 굴러가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게 보입니다. 처음엔 순수한 팬심(fan-心)에서 시작됐을지는 몰라도, 지금 회원들 간에는 질투와 모략, 거짓말과 위선 등이 횡행합니다. 거기에 과거 푸른 6인회의 회장이었던 ‘소피’의 실종 사건과 엉망진창인 마지막회를 끝으로 돌연히 종적을 감춘 원작자에 대한 소문이 다시 구설에 오르고 푸른 6인회에 속한 여자들이 하나씩 죽어나갑니다.
총 일곱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각 장마다 여섯 명의 인물들의 관점을 번갈아 취하고 있습니다. 만화에 빠져서 공주놀이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덕후’ 아줌마들은 차례가 되면 기꺼이 자신을 독자들에게 내보이는데, 화려하고 자유스러운 덕질 이면의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가 주는 흥미와 매력은 이 작품이 지니는 미스터리적인 요소들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스터리 소설로서 이 작품은 여섯 명의 인물들이 한 명씩 (죽음으로서) 퇴장하면서 그 죽음에 얽힌 사연과 배후에 도사린 위험, 음모 같은 것들에 호기심을 갖게 만듭니다. 과연 여자들의 죽음은 사고나 우연에 의한 죽음일까요, 아니면 살인일까요. 살인이라면 우발적인 범죄일까요, 아니면 치밀한 계획 아래 실행된 걸까요. 차례로 사라지는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일종의 비장미마저 느껴집니다. 작품의 이런 면모가 ‘이야미스’ 장르가 추구하는 독특한 쾌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덕후 아줌마로서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독자들은 인간의 총체적인 ‘고독’과 마주하게 됩니다.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불안, 존재에 대한 의문과 그 방식에 대한 회의,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 같은 것들 말이에요.
대부분 불혹의 나이를 넘은 인물들은 ‘삶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입니다. 늘어가는 주름살, 쌓이는 뱃살 같은,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신체적인 변화 외에 정서적인 문제들이 더 중요한 고민입니다. 결혼에 대한 후회도 들고 성장한 자녀들과는 아무리 노력해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으며 배우자는 점점 더 낯설어집니다. 나이는 점점 들고 이뤄놓은 것도 없고 모아놓은 돈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없는데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런 불안과 회의는 인물들로 하여금 다른 무언가를 (미치도록) 원하게 만듭니다. 어떤 즐거움도 찾을 수 없었던 이들은 학창시절 빠져들었던 만화와 그 팬클럽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라면 이들은 나이는 물론 삶의 온갖 시름들을 잊을 수 있으니까요. 완전히 몰두할 수 있는 거죠. 작가는 ‘갱년기’라는 단어로 핑계를 대고 있지만 이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작품은 미스터리의 외양을 뒤집어 쓴 철학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행복과 고통의 다양한 측면들을 접하며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미스터리 소설로서도 훌륭합니다. 작가는 이른바 서술 트릭을 구사하고 있는데 독자들이 멋대로 상상하도록 교묘하게 유도합니다. 엔딩에서 ‘그 인물’의 정체가 밝혀지고 난 후, 독자들은 작품의 첫 페이지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다소 불공정한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여기저기 제시된 복선들을 발견하면서 ‘아, 이게 이 뜻이었구나’를 연발하게 되죠.
철학적인 주제에 사회적인 이슈를 섞어 미스터리로 풀어낸, 무척 흥미롭고 재미난 작품입니다. 다소 유치하고 어처구니없는 구석도 있지만 약간 관대해진다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로 치부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대상에 정말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몰입하는 것도 흔한 모습이고, 원래 인간이란 게 유치하고 어처구니없는 존재니까요.
사족
1. ‘윌리엄 아이리쉬(William Irish)’의 《검은 옷의 신부(the Bride Wore in Black)》나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가 생각납니다. 두 작품 모두 추리문학사에서나 세계문학사에서나 기념비적인 작품인데, ‘마리 유키코(真梨幸子)’의 이 작품은 어떨까요. 물론 세월을 겪어야겠지만요.
2. ‘이야미스’는 읽은 후의 감상이 불쾌하다고 해서 싫다는 뜻의 ‘이야다(いやだ)’에 ‘미스터리’를 더해 (일본에서) 만든 말입니다. 이 작품 역시 국내외 많은 독자들이 이야미스 장르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연민 어린 시선으로 풀어낸 블랙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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