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TV미니시리즈 기획안을 한 편 팔았고, 소설 몇 편을 전자책으로 냈으며 문학지에 단편 두 개와 동화 한 편이 실렸을 뿐, 이렇다 할 내세울 경력이 별로 없는 제게 가장 곤혹스러운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돈도 안 되는데 왜 글을 쓰는가.’
‘돈도 안 되는데’라는 단서가 붙으면 곤혹스럽긴 하지만 답은 의외로 쉽게 나옵니다. 돈은 다른 일(주로 단순 잡무나 허드렛일)을 하면서 버니까 난 좋아하는 일을 할 거라고.
그런데 ‘돈’에 대한 전제를 빼고 단순히 이렇게 묻는다면 사정은 좀 달라집니다.
‘왜 글을 쓰는가.’
이 질문 앞에선 언제나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약간 근사하게 들리거나 괜히 철학적인 척, 예술가인 척 들리는 대답을 꾸미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전 그런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진실이 아닌 걸 진실인 척 포장하는 것보다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 더 낫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대답할 말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게 좋아서. 글 쓰는 게 재미있으니까.”
가장 솔직하고 가장 가식이 없으며 글쓰기에 대한 제 의견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대답은 바로 그겁니다. 하지만 얼마나 철없고 속없게 들릴까요.
하지만 ‘앤 라모트’의 이 책을 읽으면 그냥 그렇게 대답해도, 오히려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상대에게 눈을 부라리며 ‘남이사’라고 쏘아붙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저것 말고 다른 이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서툴게나마 그 일에 매달리는 순간들이 좋습니다. 글 쓰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야기를 ‘짓는’ 순간들이 좋은 거죠.
인물을 만들고 내가 만든 세상 속에서 활보하게 만들고 그것을 보는 즐거움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저는 (솜씨는 별로 없지만)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합니다. 이야기를 짓는 일은 음식 만드는 일과 비슷합니다. 재료(소재, 주제)를 선택하고 씻어 다듬고 자르고(구상, 구성) 요리를 하고 먹거나 먹이는(집필, 퇴고, 감상) 과정은 글을 쓰는 과정과 일치합니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신선한 식재료와 그것들을 다듬고 만지는 촉감, 요리하는 과정 그 자체를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 음식을 자신은 물론이고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다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됩니다. 그런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음식을 만듭니다. 이야기를 짓고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자는 글 쓰는 일의 진정한 보상은 바로 글쓰기 그 자체라고, 작품을 완성한 날이 생일보다 더 기쁘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기울인 헌신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선물이고 보람(본문, 322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일이 그 자체로도 훌륭한 보상이 된다는 말은 저 같은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그냥 그 일을 사랑해도 좋다고, 공모전에 당선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종이책을 출판하지 못해도, 그 일을 계속 해도 된다는 말을 얼마나 간절히 듣고 싶었는지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일보다 시작한 글을 끝까지 밀어붙여 완성해 낼 때의 만족이 자기만족뿐일지라도, 그게 얼마나 큰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길 얼마나 절실히 바랐는지요.
앤 라모트의 이 책은 작법서라기보다 글쓰기에 관한 에세이 모음집에 가깝습니다. 저자는 글을 쓰는 행위를 둘러싼, 글을 쓰는 사람의 삶 전반에 걸친 다양한 측면의 의견과 사실들을 조곤조곤 속삭이듯 적어내려갑니다.
일반 소설 작법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들은 보통의 작법서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초고, 캐릭터, 플롯, 대화, 무대 등등. 이런 내용은 오히려 백오십 페이지 정도로 압축되어 있어, 저자는 이런 기술적인 측면보다 작가로서의 삶,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작가들에게 감탄하고 베푸는 자세와 세련된 천진난만함을 갖추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개발하여 독창성을 발휘하길 요구합니다. 저자는 작가의 내면에서 생기는 일들과 온갖 어려움에도 글을 계속 써야 하는 이유를 다양한 강의 경험과 작가로서의 오랜 삶을 통해 귀한 조언을 전달합니다.
저자는 고독하고 딱히 눈에 띄는 보상도 없지만 문학적인 삶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고 강조합니다. 저자는 글쓰기를 통해서 인생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으며, 글쓰기는 도전과 기쁨과 고뇌와 헌신을 제공하며 성직처럼 인간에게 생기를 줄 수 있는 일(본문, 345쪽)이라고 합니다.
불가항력의 좌절을 겪었던 열아홉 나이에, 그것을 극복하기(보다는 무던해지기) 위해 독서와 습작에 매달렸던 게 큰 도움이 됐던 지난 경험을 기억하자면, 아래에 인용하는 저자의 말은 격하게 공감이 갑니다.
『그것은(글쓰기는) 바다에서 무시무시한 태풍이 불어올 때 배 위에서 노래를 하는 것과도 같다. 당신이 화난 풍랑을 잠재울 수는 없지만, 노래는 배 위에 함께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바꿀 수 있다.』
‘듣보잡’이라도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습니다.
사족
원제는 《Bird by Bird; some instruction on Writing and Life》입니다.
‘bird by bird’는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의 의미인데, 《쓰기의 감각》이란 번역 제목은 약간 생뚱맞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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