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작가’라는 별명답게 「제주 4․3 사건」을 빼고 작가 현기영을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물론 작가로서 훌륭한 다수의 작품들을 남긴 사람이지만 제주 4․3 사건이 없었다면 그의 문학적 색채나 성취도 지금과는 다소 달랐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작가는 자신이 보고 겪은 그 역사적 사실을 문학이라는 도구를 빌어 적극적으로 증언합니다. 작가는 많은 작품들을 통해 4ㆍ3 희생자들을 위한 무당이어 왔고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수치스러운 역사의 증언록이자 억울한 넋들에게 바쳐지는 위령굿입니다.
‘자전적 성장소설’이라는 이 작품은 내용면에선 에세이에 가깝습니다. 주로 작가가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 자신의 어린 시절의 삶과 경험, 그 시절의 모습들을 꼼꼼하게 되짚으며 그 흔적들을 시간대 순으로 나열한 이 작품엔 소설 작품으로서 흔히 말하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나 뚜렷한 서사, 주인공을 둘러싼 갈등 구조 같은 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와는 별도로 이 작품은 무척 재미있습니다. 후대의 독자들은 ‘어린 현기영’을 따라다니며 자신이 살아보지 못했던 ‘그 때 그 시절’을 경험합니다. 지금은 사라진 제주 지방의 풍속과 그 시절의 놀이 문화, 지금과는 많이 다른 시골 마을의 풍경들과 그 때의 이웃들을 만납니다.
작가가 그려내는 제주도의 풍광은 무척 서정적입니다. 그런 한편으로 인간 따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외경심도 듭니다. 그건 아마도 제주 섬의 슬픈 역사 때문일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한 개인의 기록이기 이전에 우리의 근현대사를 피로 물들인 사건에 대한 목격담이자 기록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엔 작가 현기영이 아닌 인간 현기영이 살아 있습니다.
무엇이, 어떤 동기가 작가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만들었을지 생각해 봅니다. 역사적 증언을 위해? 끔찍한 경험으로 생긴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아마 둘 다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자각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이 작품은 내내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죽음의 이미지가 전체를 아우릅니다. 작품 초입엔 아버지의 죽음이 과거를 추억하기로 한 동기로 등장하고 그 말미엔 고향을 그리워하는 초로의 한 인간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죽음을 당장 앞두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명제 아래 본다면, 예전보다 죽음에 더욱 가까워진 인간으로서, 작가는 죽음을 직시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어둠을 증명하려면 빛이 필요한 것처럼 삶에 대한 기억과 그것을 기록하는 행위는 머지않아 다가올 죽음을 인정하고 그 준비를 제대로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다른 사람들이 읽도록 출판물로 만들어 보존한다는 건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글을 쓰며 작가가 즐거웠는지 궁금합니다.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방치되어 온 상처를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는 게, 살육의 현장에 서 있는 어린 자신을 다시 보는 게 여전히 끔찍하지는 않았을까요.
어린 나이에 죽음을, 그것도 국가가 저지른 폭력에 의한 끔찍한 살육을 경험한 작가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부정하며 죽음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비로소 나이가 들어서야 (다른 작품에서처럼 가상의 화자를 내세우거나 타자(他者)의 거리를 두지 않고) 그 무대에 ‘직접’ 서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늘 자각하고는 있지만, 새삼 그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볼 때 고통은 다시 새로워집니다. 긴 세월의 터울을 두고서야 작가는 다시 직면하게 된 고통 앞에서 약간의 여유를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제주 4ㆍ3 사건에 관련한 분량은 생각 외로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사건에 대한 정치적인 판단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저 어렸을 때 겪었던 끔찍하고 무섭고 힘들었던 일로만 기억하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년 국방부에서 이 책을 불온서적으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초판이 99년에 나왔고 이미 베스트셀러의 판매롤 올린 이 책을 말이예요. 북한을 찬양하고 국군의 정신전력을 저해하는 내용을 담았다는 게 이유였는데, 뜬금없을뿐더러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내용에 대한 오해가 아니라 명백한 지능의 문제입니다. 이 책을 읽지도 않은 건 분명하고요. 북한을 찬양하다니. 북한의 ‘ㅂ’도 안 나오는데요. 당시 정부의 수준이 드러납니다.
제목에 나오는 ‘숟가락’은 (69쪽에서 보이는 작가의 의견과는 달리) 불의와 폭력에 대항했지만 좌절하고 만 선량한 이웃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 시대를 주무른 영웅이 아니라 그저 밥 한 술 편히 뜨는 걸 바랐을 뿐인 평범함, 생존을 위해서는 모든 인간이 먹어야 한다는, 저들도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평등과 보편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원히 떠나가는 사람에게 끼니는 꼭 챙기라는 민중의 연민 어린 당부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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