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17

렉싱턴의 유령_무라카미 하루키-리뷰

여행을 떠난 친구의 집을 봐주는 화자가 한밤중에 유령들을 목격하는 이야기인 렉싱턴의 유령>은 일종의 괴담이다. 소위 ‘유령 이야기’로 알려진 다른 괴담들과는 차이가 있는데 유령은 그냥 유령일 뿐이라는 것. 그들에게 있음직한 대단한 사연이 소개되는 것도 아니고 혼이 빠질 정도로 비명을 지르는 주인공도 없다. 화자는 그저 유령들이 그들만의 시간을 갖도록 제 존재를 감춘다. 특이하다면 특이한 이 작품에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읽힌다. 그럴 필요가 없다면 굳이 코를 들이밀지 않는 타인과의 거리감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읽었다. 녹색 짐승> 역시 괴이한 존재가 등장한다. 땅 속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녹색의 생명체는 주인공의 머릿속 생각을 읽는 능력을 가졌을 뿐, 악의라고는 전혀 없어 보인다. 남편이 일하러 나가고 텅..

꽃을 읽기_책 2025.04.30

버려진 아이_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리뷰

미하엘 콜하스>는 2013년, ‘매즈 미켈슨’ 주연으로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영화의 원작이다. 영화를 볼 땐 단순히 복수극으로 보였는데, 소설로 읽으니 감상이 좀 다르다.내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머물고 싶지 않소. 발로 짓밟혀야 한다면 인간이기보다는 차라리 개가 되겠소. 주인공의 이 외침은 작품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공권력이 더 이상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할 때, 정의 구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 작가는 질문한다. 우리의 주인공이 선택한 방법은 사적인 복수다. 그럼에도 질문은 남았다. 그것은 정의로운가. 대부분, 복수하는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 등지에서 주인공이 복수를 하느라 행한 폭력에 대해서는 묵인한다. 별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재산을 잃거나 ..

꽃을 읽기_책 2025.04.28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_서성란-리뷰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의 두 사람, 부부 관계를 화두로 한 두 작품, 완벽한 스테이크와 적양배추 요리>와 봉희>는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삶의 지향점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 성인이 된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제도로 한데 묶였을 때, 그 관계가 사랑을 기반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 두 사람은 얼마나 오래 같이 살았든, 얼마나 깊은 사랑을 했든, 얼마나 많은 자손을 봤든, 나는 네가 아니고, 네가 될 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너 역시 내가 아니고, 내가 될 수도 없듯이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이지 않을까. 완벽한 스테이크와 적양배추 요리>의 아내는 실직하여 방에 처박힌, 드럼 세트를 사고 싶은 욕구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완벽한 식사를 구상하고 요리하지만, 정작 그의 욕구나..

꽃을 읽기_책 2025.04.28

큰바위 얼굴_너세니얼 호손-리뷰

≪주홍 글씨≫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 다섯 편이 실렸다. 대지의 번제>를 읽고 바로 든 생각. ‘지구의 적은 바로 인간’ 맞구나. 물질문명의 추구, 무분별한 산업화를 바라보는 200년 전의 작가가 이미 이런 걱정을 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에 스며든 환경 파괴에 대한 경각심은 헌재의 독자들에게도 유효하다. 히긴보텀 씨의 참사>는 추리소설의 효시로 불리는 ‘에드거 앨런 포우’의 모르그 거리의 살인, 1841년)>보다 무려 7년이나 먼저(1834년 최초 출판) 세상에 나왔다. 범죄, 탐정, 수사과정, 의외의 결말로 이어지는 구성엔 전통적인 추리소설이 요구하는 것들을 빠짐없이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최초’라는 타이틀을 포우에게 넘겨준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결말이 다소 맥 빠지고..

꽃을 읽기_책 2025.04.27

은의 세계_위수정-리뷰

여덟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데 작가의 신춘문예 등단작인 중편, 무덤이 조금씩>이 수록된 걸 보면 작가의 첫 소설집인 듯하다.  새해 첫 소설인데 된통 걸렸다. 편편이 어렵다. 불친절하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다른 독자는 여백이 많다고도 할 수 있겠다. 감정을 알 수 없는 인물들, 개연성 떨어지고 산발적이며 일관성 없는 사건들, 울퉁불퉁 매끄럽지 않은 진행, 툭 툭 끊어지는 구성과 모호한 결말.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긴장을 하긴 했는데, 이게 이야기 자체가 주는 긴장감인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은, 그 끝을 확인하고 싶은 독자로서의 조마조마한 마음인지는 도통 모르겠다. 어둡고 시니컬한 분위기에 현실을 초월한, 꿈을 꾸듯 몽롱한 감각엔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이 보이지만, 이야기 속으로 독자들을 ..

꽃을 읽기_책 2025.01.18

방어가 제철_안윤-리뷰

‘자음과모음’ 출판사의 ‘트리플’ 시리즈 중 한 권. 이름대로 한 작가의 단편 세 편과 에세이 한 편이 실려 있다. 얇은 책이라 집어 들기 편한데, 책들과 책들 사이에 쉼표처럼 읽기 수월한 기획이다. 매 권권마다 호불호가 갈리긴 해도 대체적으로 이 시리즈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안윤’ 작가는 수상집 형식의 다른 책에서 만난 작가다. 단편 하나를 읽었을 뿐인데 아주 좋았고 인상 깊었으며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이 작가의 책을 한동안은 기다릴 것 같다.  이 책을 아우르는 키워드가 있다면, 그건 (죽음으로 인한) 이별과 그리움일 것이다. 세 편 모두 누군가를 잃어서 남겨진 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아직도 슬픔을 태우고 난 재처럼 남은 그리움을 안고 있다. 공통적으로 죽음이라는 소..

꽃을 읽기_책 2024.12.31

에디 혹은 애슐리_김성중-리뷰

어느 새 중견이 된, 김성중의 작품집.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렸다.  첫 작품인 레오니>에 나오는 가족은 마치 거대한 나무 같다. 가지들은 사방으로 뻗어 있어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서쪽으로 뻗은 가지를 마주할 수 없다. 병들어 시든 가지도 있고 파릇파릇하니 물기로 팽팽한 가지도 있다. 대부분, 그럭저럭 건강하니 전체적으로 보기 좋은 나무다. 먼 과거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같은 작품이다. 아름답게 보이고 애잔한 감상을 남긴다. 작가가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말하려 했을까. 작품집 첫 머리에 어울리는 대중적이고 가벼운 소품처럼 읽힌다.  에디 혹은 애슐리>는 무척 도발적인 작품으로 읽힌다. 작가는 ‘젠더’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기를 멈출 것을 권하는 것 같다. 젠더의 영역에서 벗어나 그저 ‘나’와 ‘너’의 상태..

꽃을 읽기_책 2024.12.06

신앙_무라타 사야카-리뷰

여섯 편의 단편과 에세이 두 편이 실렸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표제작인 신앙>이다.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 한몫 잡으려는 인물과 그를 의심하면서 서서히 동조하게 되는 다른 인물을 통해 종교(믿음)의 본질을 살핀다. 누군가 마음의 평화와 구원을 얻는다면 사이비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위험해 보이나, 사실을 알고 보면 거대 종교 역시 사이비의 성질을 갖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취향, 물질에 대한 애호의 속성 역시 (사이비) 종교가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것과 비슷하다는 작가의 주장에도 공감이 간다. 틀에 박힌 사고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기발한 전개, 아이러니 가득해 어이없는 웃음이 절로 터지는 결말이 인상적이다. 기회가 된다면 이 작품만은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꽃을 읽기_책 2024.12.04

기이한 이야기_메이 싱클레어-리뷰

제목처럼(원제는 Uncanny Stories)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하고 신비로운 이야기 일곱 편이 실렸는데, ‘작정하고 호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하지만 처음 접하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과 한 세기 전 작가가 누렸던 인기와 명성을 확인하고 싶다면 추천한다.  이 작품집엔 유령이 나오는 작품들(작가가 호러 장르를 의식하고 쓴 이야기들)이 몇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들조차 독자들의 기대를 뛰어넘는데, 보통 유령, 귀신, 죽은자의 영혼 등은 보통 악의를 가지고 복수나 현실의 혼란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등장하는 유령들은 성격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징표>에는 남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죽은 아내의 영혼이 나온다. 아내의 목적은 무뚝뚝하고 냉정한 남편이 생전에 자신을 사랑했음을, 짧았던..

꽃을 읽기_책 2024.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