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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의 유령_무라카미 하루키-리뷰

여행을 떠난 친구의 집을 봐주는 화자가 한밤중에 유령들을 목격하는 이야기인 렉싱턴의 유령>은 일종의 괴담이다. 소위 ‘유령 이야기’로 알려진 다른 괴담들과는 차이가 있는데 유령은 그냥 유령일 뿐이라는 것. 그들에게 있음직한 대단한 사연이 소개되는 것도 아니고 혼이 빠질 정도로 비명을 지르는 주인공도 없다. 화자는 그저 유령들이 그들만의 시간을 갖도록 제 존재를 감춘다. 특이하다면 특이한 이 작품에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읽힌다. 그럴 필요가 없다면 굳이 코를 들이밀지 않는 타인과의 거리감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읽었다. 녹색 짐승> 역시 괴이한 존재가 등장한다. 땅 속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녹색의 생명체는 주인공의 머릿속 생각을 읽는 능력을 가졌을 뿐, 악의라고는 전혀 없어 보인다. 남편이 일하러 나가고 텅..

버려진 아이_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리뷰

미하엘 콜하스>는 2013년, ‘매즈 미켈슨’ 주연으로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영화의 원작이다. 영화를 볼 땐 단순히 복수극으로 보였는데, 소설로 읽으니 감상이 좀 다르다.내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머물고 싶지 않소. 발로 짓밟혀야 한다면 인간이기보다는 차라리 개가 되겠소. 주인공의 이 외침은 작품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공권력이 더 이상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할 때, 정의 구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 작가는 질문한다. 우리의 주인공이 선택한 방법은 사적인 복수다. 그럼에도 질문은 남았다. 그것은 정의로운가. 대부분, 복수하는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 등지에서 주인공이 복수를 하느라 행한 폭력에 대해서는 묵인한다. 별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재산을 잃거나 ..

꽃을 읽기_책 2025.04.28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_서성란-리뷰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의 두 사람, 부부 관계를 화두로 한 두 작품, 완벽한 스테이크와 적양배추 요리>와 봉희>는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삶의 지향점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 성인이 된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제도로 한데 묶였을 때, 그 관계가 사랑을 기반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 두 사람은 얼마나 오래 같이 살았든, 얼마나 깊은 사랑을 했든, 얼마나 많은 자손을 봤든, 나는 네가 아니고, 네가 될 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너 역시 내가 아니고, 내가 될 수도 없듯이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이지 않을까. 완벽한 스테이크와 적양배추 요리>의 아내는 실직하여 방에 처박힌, 드럼 세트를 사고 싶은 욕구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완벽한 식사를 구상하고 요리하지만, 정작 그의 욕구나..

꽃을 읽기_책 2025.04.28

이웃집 아이를 차로 치고 말았어_그렉 올슨-리뷰

범죄를 빌미로 한 양심과 도덕, 믿음, 배반의 이야기. 범죄가 흘러가는 양상도 재미있지만그것을 계기로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내며 망가지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작가의 의도 역시 범죄 자체는 그저 리트머스 시험지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친절과 선의, 도덕성이나 윤리 같은 것은 인간성의 기본값일까. 아니면 그것을 구성하는 작은 퍼즐 조각조차 되지 않는 건 아닐까.

꽃을 읽기_책 2025.04.28

에고이스트_다카야마 마코토-리뷰

일단 흔한 ‘퀴어 로맨스’에서 벗어난 점에서 무척 새로웠다. 이 이야기는, 뭐랄까…, 사랑의, 사랑에 대한, 사랑을 위한, 사랑에 의한 이야기랄까.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 폭과 층위가 넓고 깊다. 두 명의 연인, 그리고 두 명의 엄마. 시작과 끝, 그리고 끝에서 비롯되는, 마치 화재로 폐허가 된 땅에서 움트는 새싹처럼힘과 생명력을 갖춘 이야기였다. 책의 마지막 장 이후엔 어떤 이야기가 진행될지 궁금해졌다. 화해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로도, 받아들임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힌다. 단순히 외로운 개인과 개인의 사랑 이야기에서 벗어나 (아마도 이조차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보다 높고 넓은 무언가가 그 위에 있음을 작가는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고 감동적이게 보여준 것 같다. 영화도 있다..

꽃을 읽기_책 2025.04.28

홀리_스티븐 킹-리뷰

경험 많은 노작가+대작가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다. 스릴러와 호러, 미스터리, 고어(gore)를 능숙하게 배제하면서도 상상하게 만들어 몸서리치게 만드는 인질극까지. 익숙하면서도 새롭다. 캐릭터들은 인간적인 매력을 지녔고 상호 간의 앙상블도 보기 좋다. 적당히 공감은 가지만 호감은 줄 수 없는 악당까지. 이야기의 리듬도 좋고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리다가도 어느 한 순간 숨통을 틔워주는 완급과 균형도 좋다. 이런 구성은 말 할 것 없고, 장면들마다 취사선택을 위해 심사숙고를 거친 태가 나, 어느 하나 낭비가 없어 보인다. 사실 스티븐 킹의 소설에 완성도 어쩌고 하는 게 불필요한 일이지 않을까. 작가의 재능이 돋보였단 말도 필요없지 않을까. 그냥 ‘재확인’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듯. 개인적인 ..

꽃을 읽기_책 2025.04.28

컵케이크 무장 혁명사_박지영-리뷰

최소한의 선의. 작가가 어떤 의도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것에 동의도 하고. 하지만 좋은 의도가 늘 좋은 작품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인물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 당위가 빈약하다.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는 그렇다 쳐도 억지스러운 진행은 짧은 분량임에도 몹시 지루하다. 게다가 적지 않은 곳에서 작가가 허둥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밑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않은 탓이겠지만, 무엇보다 ‘선과 악’이라는 관념 자체를 이야기로 형상화하려 한 의도 자체가 함정을 품고 있는 듯.

꽃을 읽기_책 2025.04.28

나의 작은 무법자_크리스 휘타커-리뷰

읽는 데 여드레가 걸렸다. 재미가 없었다는 얘기.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 인물들은 과장되고 구성은 산만하여 집약도가 떨어진다. 긴장감이 결여된 이야기는 그냥 지루하다. 이야기 자체만 봐도 구태의연하다. 폼만 잡는 인물들에겐 절실한 동기가 없다. 개연성도 부족하다. 상황에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고, 딱히 해야 할 당위가 없는 행동들을 한다. 이야기 거리는 많은 편이지만 무엇 하나 추진력을 주질 못한다. 두 명의 주인공이 문제일까, 싶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냥, 작가가 이야기를 다루는 데 서툴러 보인다.

꽃을 읽기_책 2025.04.28

자살의 연구_앨 앨버레즈-리뷰

‘죽음’이란 단어만큼 입에 대수롭지 않게 올리고, 그런 만큼 불경한 단어가 또 있을까. 마치 ‘섹스’처럼. 삶의 중요한 부분이고, 탄생보다 필연적인,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가장 공평한 미래. 어김없이 찾아오는, 우리의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미래. 거짓없는 약속은 죽음 뿐이지 않을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혹은 세상을 저버리는, 그 능동적인 자기 파괴는 저주일까 축복일까, 범죄일까, 아니면 그저 단순히 우리들의 권리일까. 역사와 정신분석과 철학과 문학에 기대어 자살을 고찰한다. 나에겐 다소 어려웠다.

꽃을 읽기_책 2025.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