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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가 제철_안윤-리뷰

‘자음과모음’ 출판사의 ‘트리플’ 시리즈 중 한 권. 이름대로 한 작가의 단편 세 편과 에세이 한 편이 실려 있다. 얇은 책이라 집어 들기 편한데, 책들과 책들 사이에 쉼표처럼 읽기 수월한 기획이다. 매 권권마다 호불호가 갈리긴 해도 대체적으로 이 시리즈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안윤’ 작가는 수상집 형식의 다른 책에서 만난 작가다. 단편 하나를 읽었을 뿐인데 아주 좋았고 인상 깊었으며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이 작가의 책을 한동안은 기다릴 것 같다.  이 책을 아우르는 키워드가 있다면, 그건 (죽음으로 인한) 이별과 그리움일 것이다. 세 편 모두 누군가를 잃어서 남겨진 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아직도 슬픔을 태우고 난 재처럼 남은 그리움을 안고 있다. 공통적으로 죽음이라는 소..

꽃을 읽기_책 2024.12.31

잠자는 살인_Sleeping Murder-1976

❝저 엉거시풀만 해도 어찌나 지독하게 안 뽑히는… 그 뿌리가 땅속 깊숙이 뻗어 있기 때문이에요. 아주 깊숙이, 흙 속으로 계속 뻗어나가는 거죠.” “예. 그 말씀이 맞습니다.” 경감이 대꾸했다. “아주 깊숙이 멀리… 멀리… 옛날까지 뻗어나가 있는 거죠. 이번 살인사건 말입니다. 18년 동안.”“아마 그보다 더 오랜 옛날부터였는지도 모르지요.” 마플양이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269쪽)❞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 스물한 번째.  ‘그웬다’와 ‘자일즈’는 뉴질랜드에서 막 결혼해 영국에 정착하려는 신혼부부다. 해외 출장 중인 자일즈를 대신해 영국 남부 해변 마을 ‘딜머스’에서 적당한 집을 찾은 그웬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본 장소에서 이상한 기시감이 그녀를 압도한다. 거실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의 가려진 ..

내 남편_모드 방튀라-리뷰

『나는 글을 쓴 적이 없으면서 글을 쓴다 믿었고 사랑한 적이 없으면서 사랑한다 믿었으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닫힌 문을 마주한 채 기다리기만 했다.』 소설 서두에 나오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 속 문장은 화자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용이다.  화자는 두 자녀를 둔, 결혼 15년 차의 주부다. 경제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고 그녀 자신도 좋은 직업을 갖고 있다. 남편에게도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바쁘고 정신없고, 익숙함에 매몰된 무관심을 보이다가 그런 와중에도 알맞은 순간에 사랑을 표현하는, 오히려 다정한 남자다. 그럼에도 화자는 매우 불행하다. 아니, 스스로 불행하다 느낀다.  화자는 남편의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남편이 자신을 떠날까 두렵고 불안하다. 사소한 행동에..

꽃을 읽기_책 2024.12.28

물고기에게 물에 관해 묻는 일_캐서린 라이언 하이드-리뷰

인문학에 관심이 많고 남는 시간에 역사책을 읽는 ‘레이먼드’는 하나뿐인 친구 ‘안드레’가 전학을 가자 더욱 외로워진다. 어느 날 ‘루이스 벨레즈’라는 남자를 애타게 찾고 있는 ‘밀리’라는 노인과 마주친다. 레이먼드는 노인을 아무런 보상 없이 도와오다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그 남자를, 이젠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어 생존의 위협에까지 몰린 시각장애인 밀리를 위해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한 마디로 ‘착한’ 소설이다. 친절과 선의, 타인에 대한 관심과 감사로 중무장되어 있다. 거의 모든 인물들이 서로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고 돕는다. 인물들은 우울하고 사건은 삭막하지만 전체적으로 밝고 따뜻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사랑스러운 동시에 진중한 문제의식, 이야기의 흡인력과 후반부(재판 과..

꽃을 읽기_책 2024.12.24

블랙케이크_샤메인 윌커슨-리뷰

‘베니’와 ‘바이런’은 어머니의 부고를 듣는다. 해양 학자로 승승장구 중인 바이런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고한 애인과 직장에서 번번이 누락된 승진으로 의기소침한 상태이고, 생활을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 하는 여동생, 베니는 커밍아웃 이후 이해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족들과 척을 진 상태다. 장례식을 위해 어렵게 한자리에 모인 남매는 모친의 변호사로부터 유언이 녹음된 음성 파일을 전달받는데, 자식들도 몰랐던 어머니의 ‘진짜 삶’을 알게 되고 혼란에 빠진다.  가족의 기원, ‘나’라는 존재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가족의 해체는 물론, 그 정통성마저 의심하는 요즘에 ‘가족’이라니. 고루하게 들리지만 꽤 획기적이다. 이야기는 진행하면서 가족 이야기의 단순한 틀을 벗어나 그 이상의 주제, 차별과 억압, ..

꽃을 읽기_책 2024.12.22

허즈번드 시크릿_리안 모리아티-리뷰

‘세실리아’는 세 딸과 훌륭한 남편을 둔, 완벽한 아내이면서 성공적인 커리어 우먼이다. 어느 날, 다락방에서 우연히, 수신인이 그녀인 남편의 손 편지를 발견하는데, ‘내가 죽은 후에 열어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남편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얼까. 그것도 자신이 죽은 후에라니. 호기심과 양심 사이에서 세실리아는 전전긍긍한다.  ‘테스’는 남편, 사촌과 함께 안정적인 사업을 꾸려나가고 있다. 어느 날 사촌인 ‘펠리시티’와 사랑에 빠졌다는 남편의 고백을 듣고 ‘멘붕’이 온다. 더 심한 건 어릴 적 쌍둥이처럼 지냈던 펠리시티를 미워하지도 못한다는 사실. 테스는 아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 친정으로 도망친다.  학교 비서인 ‘레이첼’은 삼십 여 년 전,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딸 ‘자니’의 죽음과 그 슬픔에서..

꽃을 읽기_책 2024.12.17

나무좀_라일라 마르티네스-리뷰

할머니와 손녀가 교대로 화자로 나선다. 4대에 걸친 가족사가 펼쳐지는데 할머니는 주로 과거, 손녀는 현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푼다. 그들의 가족사를 주변으로 스페인의 근대사(프랑코 정부의 독재), 자본주의의 폭력, 핍박받는 여성의 삶, 계급, 가난과 억압 등의 이슈가 서사의 층위를 다양하게 한다. 200쪽 정도의 짧은 분량 안에 4대에 걸친 여자들의 삶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야기가 오랜 세월을 거슬러야 할 때, 반드시 대하소설이 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두 여자가 사는 집은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이면서 비밀과 악의를 품은 또 하나의 중요한,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다. 어둠의 그늘이 곳곳에 도사리고 정체 모를 (초현실적인) 존재들이 출몰한다.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미래를 예지하는 할머..

꽃을 읽기_책 2024.12.11

마음에 없는 소리_김지연-리뷰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다. (당연한 소리) (무려)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렸다. 요즘 단편 한 편으로 책 한 권을 만드는 시대에 이 정도면 가성비 최고다. 다양한 인물들, 이야기들을 만날 기대로 마음이 잔뜩 부푼다. 근데 (솔직히) 기대에는 못 미쳤다.  모호한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들의 ‘코어(core)’를 찾기가 쉽지 않아 도대체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인지 의아한 작품이 있다. 물론 독자로서 나의 수준 탓일 수도 있겠다.  이야기의 집약도가 떨어진다. 산만하다는 얘기다. 단편소설에서는 낭비할 겨를이 없다.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한눈팔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Something New’가 없다.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 등에 지속적이고 지대한 관심을 가져온 독자들이라면 고루할 수 있다. 내..

꽃을 읽기_책 2024.12.09

에디 혹은 애슐리_김성중-리뷰

어느 새 중견이 된, 김성중의 작품집.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렸다.  첫 작품인 레오니>에 나오는 가족은 마치 거대한 나무 같다. 가지들은 사방으로 뻗어 있어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서쪽으로 뻗은 가지를 마주할 수 없다. 병들어 시든 가지도 있고 파릇파릇하니 물기로 팽팽한 가지도 있다. 대부분, 그럭저럭 건강하니 전체적으로 보기 좋은 나무다. 먼 과거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같은 작품이다. 아름답게 보이고 애잔한 감상을 남긴다. 작가가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말하려 했을까. 작품집 첫 머리에 어울리는 대중적이고 가벼운 소품처럼 읽힌다.  에디 혹은 애슐리>는 무척 도발적인 작품으로 읽힌다. 작가는 ‘젠더’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기를 멈출 것을 권하는 것 같다. 젠더의 영역에서 벗어나 그저 ‘나’와 ‘너’의 상태..

꽃을 읽기_책 2024.12.06

신앙_무라타 사야카-리뷰

여섯 편의 단편과 에세이 두 편이 실렸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표제작인 신앙>이다.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 한몫 잡으려는 인물과 그를 의심하면서 서서히 동조하게 되는 다른 인물을 통해 종교(믿음)의 본질을 살핀다. 누군가 마음의 평화와 구원을 얻는다면 사이비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위험해 보이나, 사실을 알고 보면 거대 종교 역시 사이비의 성질을 갖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취향, 물질에 대한 애호의 속성 역시 (사이비) 종교가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것과 비슷하다는 작가의 주장에도 공감이 간다. 틀에 박힌 사고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기발한 전개, 아이러니 가득해 어이없는 웃음이 절로 터지는 결말이 인상적이다. 기회가 된다면 이 작품만은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꽃을 읽기_책 2024.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