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쿼일’의 어린 시절을 스케치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집안에서도 미운 털에 왕따였던 쿼일은 어찌어찌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그 결혼조차 파경을 맞고 적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적응도 어려운 일들만 전전하다가 부모님의 장례식 때문에 만난 ‘애그니스’ 고모와 함께 두 딸을 데리고 선조들의 고향인 ‘뉴펀들랜드’로 향합니다.
쿼일은 전형적인 루저(loser)입니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정말 운 좋게 결혼을 하지만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니, 쿼일 스스로는 행복했다고 믿습니다. 비상식적인 와이프 때문에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고 나서도요. 독자들은 차라리 그렇게 믿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며 쿼일을 동정하지만, 우리 삶이라고 조금이라도 나을 게 있을까요.
쿼일은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추한 외모는 그의 탓이 아니었고 수줍고 소극적인 성격이나 모자란 자신감은 타고난 성정이 그런 탓도 있겠지만 부모가 적절한 동기부여를 했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탓에 쿼일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족이나 행복과는 먼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쿼일 자신이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쿼일은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을 때도 상황의 긍정적인 면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능력이 부족한 신문기자 일이지만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하려는 것도 그의 장점이자 매력입니다.
쿼일 가족과 애그니스 고모가 미국을 떠나 선조들의 고향 땅을 밟으면서 그의 삶에 약간의 빛이 스며듭니다. 경력을 살려 일을 시작한 지역신문사에서는 자신에게도 발휘할 능력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그 기회도 얻게 됩니다. 집수리를 스스로 하는 수완도 발휘하고 친구들도 사귀고, 무엇보다 좋은 건, 이웃에 매력적인 여자 ‘웨이비’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겠죠.
작가는 쿼일의 삶을 관조하듯 풀어냅니다. 그다지 참견하지도 않고 무언가 중요한 의미가 있을 법한 사건, 목이 잘린 시체나 웨이비와의 로맨스에도 그다지 집중하지 않습니다. 애그니스의 아픈 사연이나 아버지의 비밀, 나아가 나중에야 밝혀지는 선조들의 정체도 그저 언급하고 마는 식입니다.
작가는 마치 중요한 건 우리 삶 그 자체이고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그것이 심각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인생을 뒤흔들 수는 없으며 그런 한편, 그 모든 일이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삶의 일부이고 그것들이 모여 우리의 인생을 이룬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이런 조언은 쿼일처럼, 삶이 형편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위안이 되지 않을까요. 그것들이 아무 일도 아닌 건 아니겠지만 그것들로 인해 인생이, 삶 전체가 허물어진다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일까요.
작가 ‘애니 프루(Annie Proulx)’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입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와 흥미진진한 사건들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다소 밋밋할 수 있습니다. 대중적인 요소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데, 독자들을 사로잡을 만한 사건이 터지거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다이내믹함도 없으며 속 시원한 엔딩이나 ‘아, 이게 끝이구나’ 하며 한숨을 내쉬게 만드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슴을 휘몰아치는 감동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약간 어려우며 작품에 묘사된 뉴펀들랜드의 자연 풍광이 얼마나 훌륭하며 그것에 홀딱 반할 독자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을지는, 글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투자한 시간은 아깝지 않습니다. 신기하게도 책장이 잘 넘어가니까요. 번역을 거치긴 했지만 좋은 문장, 특히 숨은 곳에서 빛을 발하는 작가의 유머 감각은 인상적입니다. 쿼일은 무척 호감이 가고 인상적인 캐릭터입니다. 재미있는 인물이죠. 그의 삶이 희망적으로 보이는 건 작가의 기교나 이야기의 힘보다도 은근히 발휘된 작가의 유머 감각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행간에 녹아있는 작가의 유머는 어떤 불행과 어떤 충격도 ‘흥, 까짓것’ 하게 만들어버리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 초연한 자세가 스며 있습니다. 그게 그렇게 쉽냐고요? 물론 아니라는 걸 알기에 작가는 쿼일을 통해 독자들에게 주문을 걸고 있는 게 아닐까요. 사랑과 유머 감각. 이 두 가지면 된다고. 삶에 가장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산은 그것들뿐이라고요. 물론 믿거나 말거나겠지만요.
'꽃을 읽기_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기의 감각_앤 라모트-리뷰 (0) | 2019.11.27 |
---|---|
갱년기 소녀_마리.유키코-리뷰 (0) | 2019.11.23 |
아무도 문밖에서 기다리지 않았다_매슈 설리번-리뷰 (0) | 2019.05.16 |
길 위의 X_기리노 나쓰오-리뷰 (0) | 2019.02.06 |
혀_조경란-리뷰 (0) | 2019.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