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심연_퍼트리샤 하이스미스-리뷰

달콤한 쿠키 2017. 5. 11. 07:21


작지만 내실이 탄탄한 출판사를 경영하는 ‘빅터’는 그가 사는 마을에서 사람 좋기로 유명합니다. 마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빅터의 친구들이고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죠. 예의바르고 유순하며 식견도 높은 빅터는 언제나 환영을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빅터에게 호감을 갖는 이유는 사람이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그 아내 ‘멜린다’때문이기도 합니다. 빅터는 멜린다의 바람기를 잘도 참아내고 있었거든요. 빅터에 대한 친구들의 존경과 애정은 어느 정도 ‘동정’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빅터의 아내 ‘멜린다’는 쉬운 말로 막 나가는 여자입니다. 남편과 아이에 충실한 것도 아니고 애인을 밥 먹듯이 갈아치우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연애를 자랑하듯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사람이죠. 이야기를 따라 부부의 관계를 들여다보게 되는 독자들 역시 빅터를 동정하고 그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됩니다.

이런 감정이입은 소설의 삼분의 일 지점을 지나며 위기를 맞게 되는데, 빅터가 더 이상 아내의 불륜을 참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빅터가 멜린다의 애인을 수영장에 빠뜨려 죽이는 모습을 본 독자들은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요. 그 인물에 대해 갖던 동정을 거두어들이고 등을 보일까요? 그가 살인자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마 많은 독자들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빅터에게 더욱 다양한 감정을 주리라 예상합니다. 제가 그랬던 것 처럼요. 빅터의 범죄 행위는 인물에 대한 독자들의 감정을 확대하고 강화합니다.




빅터의 세계는 정확히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책과 신문, 직업, 취미, 책임과 의무가 있는 ‘평화로운 세상’과 말썽 많은 아내와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는 딸, 그리고 체면을 차리기 위해 억지로 웃어줘야 하는 친구들이 있는 ‘혼돈의 세계’죠.

빅터는 그 두 세계를 바삐 오가며 위태롭게 살고 있습니다. 처음엔 다소 모호했던 그 경계는 멜린다로 하여금 서서히 붕괴됩니다. 멜린다는 자신의 무분별한 연애 행각을 떠벌임으로서 남편의 화를 돋우고 모욕을 주며 좌절하고 분노하게 만듭니다.

작가는 빅터가 힘들게 이끌어온 두 세계의 간극을 서서히 좁히며 긴장을 일으키다가 그 좁은 틈새를 살인이라는 범죄적 행위로 메우며 클라이맥스로 이끕니다. 작가는 그 행동의 과정, 그것에 동반하는 심리 기제 등에 온 힘을 기울입니다.


리뷰 앞에서 ‘스포일러가 있다는 경고’를 하려다 말았습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의 이 작품은 범인을 끝까지 함구해야 하는 추리소설이 아니니까요. 이 작품은 작가의 장기가 골고루 발휘된 ‘범죄 심리’ 소설입니다. 작품의 백미는 ‘범죄를 보여주기’보다 ‘범죄에 이르는 심리’에 있죠. 믿음직하고 사람 좋아 보이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였던 빅터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면서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지고 독자들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됩니다.


작가는 한적한 시골 생활을 살아가던 인물이 그 일상이 깨지고, 그것을 견디다 못해 분노를 터뜨리는 과정을 세세하고 유려하게 보여줍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미로를 헤매다 가까스로 출구를 찾은 느낌이 들지요. 멋지고 아름답게 꾸며졌지만 구석구석에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미로 말예요. 물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미로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지만요.




빅터는 철면피의 냉혈한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살인을 저질렀으면서도 아무런 동요 없이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빅터는 항상 차분하고 생각이 많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명민합니다. 특별히 남을 속이거나 고의성 다분한 거짓말을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사람들의 믿음을 쉽게 얻는 사람이죠. 사실 이런 면면은 범죄자들에게는 장점입니다. 그리고 그건 캐릭터나 인간성의 문제이기보다는 외부의 요인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착하기 때문에 평판이 좋은 것도 있지만 우연으로 얻게 된 좋은 평판 때문에 일부러 착하게 보이도록 노력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두 경우는 엄연히 다르며, 범죄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사람은 무서운 살인마입니다. 작품 속에서 세 사람이나 죽이죠.


하지만 이 사람에게 죄를 제대로 물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분명 ‘살인’이라는 범죄적 행위에 대한 책임은 물어야겠지만, ‘법’은 빅터와 범죄 사이의 상관관계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이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니까요. 누굴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어떻게 죽였는지, 살인으로 얻는 이익이 무엇인지, 기타 등등.


그런 관점에서 이 작품의 진짜 악인은 오히려 멜린다처럼 보입니다. 이 여자의 바람기는 진정한 사랑을 남편에게서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빅터를 모욕하고 자극할 수만 있다면 어떤 남자도 괜찮을 듯 보이죠. 이혼을 거절하는 멜린다는 ‘빅터의 파멸’을 보고야 말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이야기 내내 보여주는 멜린다의 ‘이유 없는 악의’는 깜짝 놀랄 만한 엔딩에 어느 정도 구실을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작가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요.




57년에 세상에 나온 이 작품은 ‘선과 악’이라는 주제, 인간의 심리, 범죄성이라는 소재 등, 작가가 평생 주물렀던 재료들이 망라돼 있습니다. 작가의 대표성을 확인할 수 있지요.

앞서 이 년 전에는 ‘리플리 시리즈’의 신호탄이 된 <재주꾼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가 발표되는데,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바로 ‘르네 끌레망(René Clément)’의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입니다. 두 작품엔 비슷한 점이 많은데, 범죄의 동기나 기회 등을 볼 때, ‘톰 리플리’와는 달리 이 작품의 ‘빅터 밴 앨런’은 ‘진짜 악인’처럼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게 ‘악인’으로서의 수치인 건지, ‘주인공’으로서 체면을 구긴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둘 다일 수 있는데, 그건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어떤 감정을 얼마나 실었느냐, 하는 것에 많이 달라질 것 같아요. 이런 이슈로 독서 토론을 한다거나, 작가의 작품 세계를 논해도 꽤 흥미진진한 결과가 나올 것 같고요.




사족.


‘패트리샤(Patricia)’가 ‘퍼트리샤’, ‘다프네(Daphne)’가 ‘대프니’, ‘베라(Vera)’가 ‘비라’가 된 건 언제부터였죠? 외국 인명의 이런 표기가 바른 것인지는 몰라도 영 어색해요. 그 근거가 뭔지도 모르겠고. ‘오렌지’가 아니라 ‘어륀쥐’처럼 들린단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