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_윤대녕-리뷰

달콤한 쿠키 2018. 1. 16. 06:32


살면서 누구나 기억들을 쌓습니다. 어떤 기억은 ‘추억’이 되고 어떤 기억은 ‘악몽’이 되죠. 악몽 같은 기억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남깁니다. 그 상처는 육체의 상흔과는 달리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도 없어 그것들을 잘 다루는 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소홀히 방치된 상처의 후유증은 거의 평생을 갑니다.


내면의 상처는 ‘암흑’과도 같습니다. 그 넓이나 깊이는 다양하겠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의 내면엔 ‘암흑’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암흑은 우리를 가둡니다.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우리는 종종 앞으로 나아가질 못합니다.


작가 ‘윤대녕’은 그 내면의 암흑과 불안을 ‘호랑이’로 표현합니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모두 내면에 호랑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영빈’과 ‘해연’은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진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두 사람은 구 년 만에 우연히 다시 만나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지만 영빈은 자신이 해연을 기억하는 만큼 해연도 자신을 기억하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구 년 전의 그 일에 대해서 두 사람은 아무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건 두 사람이 여전히 그 사건의 그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주변에 죽음의 그림자가 망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또 다른 이름이자 중요한 요소이고 인생 전반에 걸쳐 부득이하게 마주치는, ‘아주 흔한 사건’이지만, 대개의 사람들에겐 ‘아주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영빈과 해연은 다릅니다. 그들은 ‘죽음의 문턱’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영빈’은 가장 구체적인 인물이고, 내면의 ‘호랑이’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대응)하는 인물입니다. 삶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제주도로 떠난 영빈은 낚시에 몰두합니다.


‘바다’는 영빈에게 구원의 장소이고 ‘낚시’라는 행위는 일종의 기도처럼 보입니다. 영빈은 내면의 호랑이와 조우하지만 그것을 포획하거나 죽여 없애는 대신 자유롭게 풀어줍니다. 작가가 작품 속에서 언급한 ‘자신을 용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어려운 문제로 보입니다.

작품의 막바지에 이르면 영빈과 해연의 ‘썸타기’가 비로소 로맨스로 변합니다. 작가는 두 연인을 통해 삶의 고통, 번민,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보다 현실적인 제안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둘 다 어렵긴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는 제주도로 떠난 영빈의 모습을 기둥으로 해연과의 로맨스, 재일교포 ‘히데코’를 통한 정체성과 소속감, 고립의 문제, 형의 자살로 불거진 아버지와의 갈등 등의 줄기로 진행됩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정서에 느슨한 진행, 난해하고 어려운 작품입니다. 현실적인 소재에 다채롭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로 잘 읽히는 작품이지만, 철학적인 주제와 가끔 등장하는 선문답에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 특히 취재 형식의 문답으로 이뤄진 대사와 어색한 문어체의 등장도 거슬립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감칠맛 나는 대사, 단출하고 정갈한 풍광 묘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잘 쓰인 문장이 이런 감흥을 준다는 게 새삼스럽습니다.


하지만 과연 작가는 독자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우리를 주저앉게 만드는 삶의 여러 고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고를 구하고 싶어집니다. 벌떡 일어나 툴툴 털고 새로 시작할 용기를 갖는 게 쉽지는 않으니까요. 실패라는 경험은 우리를 겁먹고 불안하게 합니다. 자신이 초래한 게 아니고 그 원인이 외부에 있다면 더욱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을 원망하고 자신의 운을 탓하느라 바쁠 테니까요.


작품 속, 영빈의 말이 힌트가 될까요.


『이젠 스스로 불안을 잠재우는 수밖에 없어. 안타깝지만 그건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이야. (본문, 344쪽)』


결국...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