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로 치자면 ‘영상 자료원’ 정도의 직장에서 자료 보관 담당으로 일하고 있는 ‘데이빗’은 우연히 접한 범죄 기록 영상으로, 가족들과 살고 있는 제 집에서, 백 여 년 전,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가장(家長)이 부인과 아이들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운 나쁘게도 역시 아내 ‘앨리스’의 외도를 의심하던 데이빗은 의심 많은 남편답게 아내를 미행하다가 불륜현장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내는 실종됐다가 집 근처 ‘운하’에서 익사체로 발견됩니다. 아내의 죽음 전후로 환각에 시달리는 데이빗은 과연 믿을 만한 주인공일까요. 그의 경험은 과연 환각일까요, 아니면 실체가 있는 현실일까요.
시작은 꽤 좋습니다. 과거의 끔찍한 사건을 의미심장하게 던져 놓은 후 현재의 드라마를 치밀하고 느긋하게 진행시키는 플롯이나, 주인공은 과연 믿을만한 사람인가, 하는 의문에서 비롯되는 긴장감, 과거 사건과 현재 사건이 어떻게 맞물릴까, 하는 호기심, 모두 힘이 있는 편이죠. 익숙한 설정이지만 호러와 미스터리가 잘 섞여 있습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품고 외줄타기 하고 있는 것 같은 주인공의 위태로운 연기도 좋고 분위기도 썩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하면서 이야기는 그 초점을 잃고 동분서주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디어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아이디어가 많다는 것은 장점일 수 있지만 이 영화에서는 분명 단점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만 취해야 하는데, 욕심 많은 감독은 그 많은 재료들을 한 영화에 모조리 쏟아 붓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영화는 그냥 산만합니다.
각각의 아이디어들을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리 독창적이지는 못해도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 추구하는 전체적인 모양새 등과는 잘 어울려서 그 고유성은 있는 편이죠. 문제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통에 재료들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많은 아이디어를 한 그릇에 던져 놓고 그것들을 마무리하느라 허둥지둥한 모양새인 엔딩도 마찬가지죠.
어떤 아이디어가 이야기 안에서 효율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를 준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관객들의 감동, 혹은 정서적인 동요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 아이디어가 이야기 속의 다른 요소들과 상부상조해서 관객들에게 꾸준한 자극을 주어야 하죠. 그러려면 상징성 획득이나 관객들의 인상에 각인되기를 전제로 한 반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데, 이 영화에서의 아이디어들은 그냥 툭, 툭, 던져지고 말 뿐 어떤 의미를 재생산해 낼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이 영화에서의 과거의 범죄는 현재 데이빗에게 일어난 사건의 유사성으로 꽤 큰 쓸모를 갖습니다. 데이빗의 광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 즉 가장 큰 (데이빗에게나 관객에게나) 호기심과 두려움의 대상인 거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것을 다루는 태도를 보세요. 18세기의 복장을 한 의문의 남자를 보여주다가 느닷없이 여자 귀신을 등장시킵니다. 이 여자 귀신을 통해 앨리스의 죽음의 원인과 데이빗의 죄의식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이는 그만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는 일등공신이 되고 맙니다. 이 영화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살해당한 여자의 복수담인지, 이성 잃은 남자의 광기인지조차 헷갈리는 거죠. 이런 감상은 곧 영화의 ‘목표’가 없다는 것(이 영화는 반대로 그 ‘목표’가 너무 많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깃발이 여기저기 꽂혀 있는 통에 관객들이 눈을 어디다 둬야 할 지, 어디서 감동을 먹고 어디서 오금이 저려야 하는지 모르게 되는 겁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영화들도 많습니다. <샤이닝(the Shining)>, <링(Ring)>, <크롤스페이스(the Crawlspace)>, 최근의 <더 팩트(the Pact)>, 헨리 제임스의 소설 <나사의 회전(Turn of the Screw)>, 셜리 잭슨의 소설 <헌티드 힐의 유령 (the House of the Haunted Hill)>까지. 한 두 편이면 '오마주'라는 핑계나 댈 수 있죠. 이 정도면 치명적인 거 아닌가요.
대체 어떤 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걸까요. 감독의 의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딕 호러와 심리 미스터리를 뒤섞은 장르에 과거의 범죄에 대한 호기심과 바람난 아내에 대한 질투와 분노 등의 감정에 점점 잠식당하는, 그러다가 결국엔 광기에 이르는 남자의 내면을 보여주고 싶었겠죠.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용두사미’ 격입니다. 시작은 참 좋았는데, 많이 아쉬워요.
영화 정보는 아래로...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88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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