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기_영화

동주_2016-리뷰

달콤한 쿠키 2016. 5. 2. 07:31


개인적으로 ‘전기(Biography)’라는 장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신사임당의 위인전을 읽었는데, 막상 신사임당이 쓴 게 아니라서 놀랐던 적이 있었어요. 어린 생각에도 다른 사람이 실존했던 누군가의 어린 시절이며 어찌어찌 살아왔다는 얘기를 쓴다는 것이 가능할까, 저 안에 일말의 진실이라도 있을까, 하는 의심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의심 섞인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앞으로 위인전은 읽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결심이 사라졌을까요?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약간 관대해졌죠. ‘평전’ 같은 소위 전기물은 아직도 읽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서전’을 읽는 편이 낫죠. 아무리 자기자랑 일색이라도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돌이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영화는 어떨까요. 보긴 봅니다. 다큐멘터리 정도는 편하게 봐요. 문제는 극영화인데, 보긴 보되 그냥 ‘드라마’로 봅니다. 그렇지만 사실이긴 하되 진실은 아닐 수도 있는, 극화를 위해 어느 정도 ‘각색된’ 이야기로 그것들을 대해요.

‘각색 = 거짓말’이란 공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발언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각색과 거짓말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각색은 ‘사실을 기반으로’ 이야기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극적인 ‘생략과 비약’의 과정을 포함합니다. 진실도 아니면서 거짓도 아닌 거죠.



‘전기 영화’로 소개됐고 역시 그렇게 소비되고 있는 <동주> 역시, 본인은 드라마로 감상했습니다. ‘시인 윤동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윤동주의 실존 어쩌구, 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생각해요. 본인에게 이 영화는 작가와 감독이 사실을 기반으로 만든 창작물이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역시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잘 만든 캐릭터였습니다.

하지만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들을 소재로 한 이 영화를 ‘전기 영화’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이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이 영화가 전기 영화를 의도했다는 사실을 빼먹으면 안 되겠죠.



전기 영화로서의 <동주>는 평범합니다. 이 영화는 ‘윤동주’의 전기 영화이기도 하고 ‘송몽규’의 전기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의 두 사람의 삶은 서로를 통해서 의미를 갖습니다.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윤동주의 삶은 송몽규를 통해 투영됩니다.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의 송몽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의 삶은 서로를 통해서만 ‘영화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영화에 의하면) 친구에 대한 열등감이 있는 동주는 소극적인 인물입니다. 동주는 조국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행동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시’를 씁니다. 각자 잘 할 수 있는 일이 다르고 시인으로서의 저항은 동주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과격한 행동이었으니, 그를 잘 이해하는 몽규는 동주를 비난하지 않아요. 그렇게 결과적으로 ‘저항 시인’이 된 동주에 비해 몽규는 독립운동에 과감히 투신함으로서 보다 직접적인 방법을 택하죠.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나름의 최선으로 조국의 슬픔을 나누고 알리며 해결하고자 했던 두 인물은 결국 억울한 죽음으로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동주>를 전기 영화보다 ‘드라마’로 보려 할 때, 이 영화는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영화는 한 인물의 가장 드라마틱하고 처절했던 한 순간을 담기 위해 여러 극적 장치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두 인물의 삶을 동시에 다루면서도 윤동주의 삶을 약간 더 비중 있게 다룹니다. 그건 아마도 윤동주가 송몽규보다 더 널리 알려졌고, 다수의 훌륭한 시로서 후대에 의해 기억되고 회자될 기회가 더 많았기 때문이겠죠.

반면 송몽규는 (비록 실존 인물이긴 해도) 영화 안에서는 윤동주를 설명하기 위해서만 기능합니다. 드라마틱하게 설계된 두 사람의 관계는 윤동주의 내면을 보여주는 데 매우 효과적이지만 정작 독립투사로서의 송몽규의 삶은 영화 안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 역시 윤동주를 보여주기 위한 배경입니다. 영화는 전쟁의 참상과 일본의 만행을 적극적으로 고발하고 있지는 않거든요. 만약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윤동주의 죽음’을 언급만 하는 정도로 다루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이 영화가 일으킨 사회적 반향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귀향>보다 비교적 약한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귀향>과 마찬가지로 같은 해(1943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아직도 궁금한 윤동주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그냥 놓아줍니다.


대신 영화는 위험에 처한 조국을 위해 목적은 같지만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이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시인으로서의 윤동주 외에 한 개인으로서의 윤동주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합니다. 시인 윤동주가 알고 보니 어쨌더라, 하는 캐릭터의 반전을 노리는 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슬픔과 억압의 시대에 태어난 한 개인이 시인으로 데뷔하고 그의 시들이 ‘저항시’가 된 배경과 그 ‘과정의 드라마’를 파고들죠. 우리가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윤동주의 모습에 영화는 그 깊이를 더하는데, 영화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충분히, 어쩌면 그 이상으로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친척이고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이라는 두 인물의 설정은 얼핏 ‘모짜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동주와 몽규의 갈등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었으니까요. 동주는 몽규의 치열함을 부러워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갑니다. 몽규 역시 동주를 억지로 끌고 가는 대신 그가 가려는 길을 존중해주죠. 두 사람의 문학적 재능은 그 관계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관계는 ‘라이벌’이라기보다 상호 협조하는 ‘동료’의 관계였습니다. 영화를 위한 태그라인(tag line)에 보이는 ‘라이벌’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섣부르게 보입니다.


또한 두 사람의 관계에서, 오늘날 TV 예능 프로에서 자주 언급되는 ‘브로맨스’를 찾으려는 관객들도 있을 겁니다. 그게 로맨스건, 동료애건, 우정이건, 혹은 섹슈얼리티를 행간에 숨긴 사랑이건,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아도’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생각됩니다.



이 영화, <동주>가 아름답고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건, 영화 저변에 ‘사람에 대한 사랑’을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윤동주의 많은 시들 역시 궁극적으로 사람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음은 물론이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신의 조국을, 제 민족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인터넷에서 이 영화에 대한 글들을 찾아 읽다보면, 영화 속의 윤동주가 나약한 기회주의자로 보인다는 불평이 적지 않은데, 그 주장은 사실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관객들 각자가 판단할 노릇이고 그 근거 또한 관객들 각자의 영역 안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영화가 윤동주를 그렇게 표현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잠깐 적었듯이, 누군가의 삶을 글로, 혹은 영상으로 표현하는 데엔 엄청난 어려움이 따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진정 모릅니다. 다른 시대를 살다 간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그 시대 밖의 타인이 접근할 수 있는 단서는 지극히 적고 한정적입니다. 아무리 치밀하고 세심한 ‘사실’ 조사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들이 명백한 ‘진실’이 아닌 이상은 ‘주관적인’ 유추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죠. 일상에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니 더욱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는 거고요.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영화는 할 수 있는 만큼 했어요. ‘위험한’ 일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잘’ 했죠. 그 결과 역시 어느 정도의 성취에 도달했다는 생각입니다. 이 영화 속의 윤동주가 마음에 들지 않고 자신이 안다고 믿는 윤동주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면, 결국 윤동주에 관한 자신의 영화를 만드는 수밖에 없겠죠. 아무리 전기 영화라도 이 또한 창작물인데 그건 인정해 주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