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기_영화

귀향_2016-리뷰

달콤한 쿠키 2016. 5. 2. 07:01


개인적으로 영화를 선택할 때, 이것이 ‘보고 싶은 영화’인지, 아니면 ‘보아야 하는 영화’인지를 생각합니다. ‘보고 싶은 영화’는 백퍼센트 본인의 취향에 따릅니다. 선호하는 장르이거나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거나 좋아하는 감독이 연출했거나 혹은 좋아하는 문학 작품을 각색했다거나 하는 등의 조건이 비교적 분명하죠. 반면 ‘보아야 하는 영화’는 그때그때 다릅니다. 일단 상황과 무드(mood)에 따라 다르고 담고 있는 테마나 보여주려는 이슈가 만나는 제 사회적인 관심은 꽤 유동적이기 때문이죠. 그런 단서에 맞아 떨어지는 영화라면 그건 ‘꼭 봐야’ 합니다. 이런 경우, 장르나 배우, 감독, 혹은 각색의 여부 등의 개인적인 취향은 어느 정도 무시됩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본인에게 어떤 영화였을까요.



1943년. 빈농(貧農)의 딸인 ‘정민’은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1991년. 성폭행을 당한 트라우마를 겪는 ‘은경’은 어떤 만신(萬神)의 눈에 띄어 신딸로 생활하다가 한복을 짓는 노파인 ‘영옥’을 만나고, 그 총명한 신기(神氣)로 영옥의 과거와 자신의 전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과 종전 46년 후의 이야기를 교대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진혼(鎭魂)’의 의미를 갖습니다. ‘歸鄕’이 아닌 <귀향(鬼鄕)>이라는 제목과 ‘살풀이’ 등의 무교(巫敎)적인 소재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의 목적은 의외로 소박합니다. 낯선 땅에 강제로 끌려가 젊음을 착취당하고 미래와 꿈을 희생당하며, 억울하게 생을 마친 사람들의 원혼을 고향으로 불러들여 위로해주자는 거죠. 이 영화엔 어떤 정치적인 의도도, 이데올로기적인 메시지도 없습니다. 이 영화는 슬프고 처절한 역사를 돌이켜보고 전쟁의 참상(慘狀)을 고발하며, 그 범죄에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기리고 위로하려는 목적에 충실합니다.


이 영화의 의미와 기능의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습니다. 이 영화는 드라마이면서 ‘역사 기록물’로서의 역할도 합니다. 수많은 홀로코스트 영화들처럼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의 더 중요한 목적일 수도 있어요. 역사를 알기 위해 역사책에만 의존하기가 어딘지 께름칙하다면 더욱 그렇겠죠. 어쩌면 우리의 다음 세대, 혹은 그 다음의 세대들은 ‘위안부’라는 말의 의미와 그 단어에 서린 슬픔과 한(恨)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재작년인가 삼일절에 이런 기사가 인터넷에 뜬 적이 있었습니다. ‘3․1절’을 ‘아이스크림 먹는 날’로 알고 있는 초등학생들이 많다는 우려 섞인 내용이었죠. 우리의 역사를 잊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흔한 얘기지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들 하니까요.



물론 이 영화에도 단점은 있습니다. 사실 드라마로서의 만듦새는 그렇게 말끔하지 않습니다. 특히 중반을 넘어서면 이야기가 툭툭 끊기는 느낌이 있죠. 제작 환경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사실이 핑계는 될 수는 없겠지만, ‘손숙’이나 ‘백수련’ 같은 베테랑 배우들이 힘겨워 하는 모습을 보면 많이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향>은 본인에게 ‘꼭 봐야 하는’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꼭 봐야 한다고’ 말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위안부 문제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고, 설사 만의 하나, 그 문제가 철저하게 해결됐다고 해도 그 과거는 우리의 후대(後代)를 통해서도 계속 회자되고 학습되어야 하며,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이 (국민으로서가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 영화는 <디 워> 같은 영화가 조장한 (정작 영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소위 ‘선동된 애국주의’나 <국제시장>의 ‘감성 팔이식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 영화는 ‘인간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는 우리가 실제로 겪은 사실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일말의 진실 정도는 담고 있단 말이죠. 이 영화의 이야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있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전쟁이라는 범죄의 역사 속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며 그 기준도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 안에서, 그것이 범죄라는 가정 아래, 그 피해자와 가해자는 비교적 명확합니다.

‘범죄라는 가정 아래’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그것은 분명한 범죄였습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명확하게 존재하는 범죄였죠. 더 끔찍한 것은 그 피해자들이 대부분 약소국의 ‘여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서양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세계관으로 저질러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범죄였던 셈이죠.


영화는 그 과거에 대해, ‘사실’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 시대, 우리의 여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역사가 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리고 전후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말예요.


진짜로, 우리들은 과거의 그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까요. 묻는 게 어리석을 정도로 분명한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몇 분 남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바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크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영화의 엔딩은 그래서 무척 인상적입니다. 가해자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범죄자를 처단하는, 소위 인과응보 식의 결말은 아니었죠. 고향에 다시 돌아온 정민이 소박한 밥상을 사이에 두고 부모님과 마주하는 엔딩은 이 영화의 가장 슬프고 진솔하며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바라고 있는 것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으니까요.



이 영화와 관련된 글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읽다보면, 간혹 이 영화를 정치적인 이슈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공격’에 이해 가는 면도 있습니다. 이 영화엔 솔직히 ‘정치적인 부분’이 있으니까요. 인정해요. 하지만 그것은 이 영화의 목적을 왜곡하고 오히려 정치적으로 ‘역이용’하려는 과정에서 생긴 ‘부가적인’ 측면일 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본다면 결국 생산되는 것은 가십(gossip)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고요. 달을 보랬더니 손가락만 보고 있는 걸 어떻게 탓하겠습니까.

적고 보니,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왜곡된 시선으로 보려는 사람들의 의도는 뭘까, 궁금해집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을 이런 때 인용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요.



사족.

왜 기독교나 불교, 천주교가 아닌, 우리의 전통신앙인 ‘무교(巫敎, 무속(巫俗)이 아니라)’였을까요. 무교가 여성 중심이고 종교권의 기득세력 밖에 있다는 사실이 ‘위안부’ 문제를 ‘전쟁 범죄’를 벗어나 ‘여성 인권’의 문제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나 그 문제에 여전히 관심을 갖고 적어도 조금의 노력이라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는 점 등이 이해되는 부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