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등 뒤의 기억_에쿠니 가오리-리뷰

달콤한 쿠키 2018. 4. 1. 17:01


초로의 ‘히나코’는 오래 전에 실종된 동생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누가 보기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게,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 같지만 그렇지는 않고, 단지 후회스러운 과거를 뉘우치는 방식으로 동생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는 겁니다. 여기엔 실종인지 가출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 죄책감도 실려 있죠.

 

이런 히나코를 중심으로 그 사람의 이웃들이 등장합니다. 히나코에게 호기심을 갖는 ‘류지’와 그의 아내, 또 다른 이웃인 ‘고지마’와 ‘도쿠코’ 부부, 히나코의 두 아들과 며느리, 혹은 애인, 히나코의 전남편, 그리고 바다 건너 ‘나쓰키’와 ‘고지마’ 선생님.

 

 

감상을 미리 밝히자면 이 작품은 ‘속 빈 강정’ 같습니다. 이야기가 분주히 흘러가긴 하는데 알맹이가 없어요. 그리고 약간 두서가 없죠.

각각의 인물들은 서로 상관이 없는 듯 보이면서도 또 완전한 타인들은 아닙니다. 느슨한 관계들의 인물들을 가지고 작가는 이야기의 재료들을 방대하게 펼쳐놓기만 할 뿐, 뭐 하나 마무리를 하고 있질 않지요. 결말이 없습니다. 독자로서 ‘아, 그랬던 거구나’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고지마 선생님의 정체인데, 이조차 ‘그래서 뭐?’ 수준입니다.

 

엔딩이 상당히 성급합니다. 성급하다기보다 정리가 안 돼요. 부엌을 온통 어지르고 뭔가 만들긴 했는데, 상을 차리려고 보니 만든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죠.

뭔가 이야기가 더 진행되어야 할 것 같은데 작가는 황급히 끝을 맺습니다. 열린 결말과는 다른 거죠. 예를 들어 류지가 과거에 저질렀던 뺑소니 살인 얘기나(거기다 사체 유기까지. 이건 정말 엄청난 범죄 아닌가요?), ‘마사나오’와 ‘에리코’의 불화 같은 문제는 완벽한 해결은 아니더라도 그것에 버금가는 ‘정리’가 필요한 소재들입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냥 모르는 체 해버리죠.

 

작품 분량이 비교적 짧아서(199쪽) 이야기를 제대로 마무리할 여유는 충분했다고 봅니다. 지금으로선 이 작품은 방대한 드라마 시리즈의 첫 회를 본 기분이 들어요. 인물들과 그 관계를 소개하고 만 것 같은, 그런 감상이 들어요.

 

 

그럼에도 ‘에쿠니 가오리(江國香織)’의 팬들이 반길 요소들은 두루 갖추고 있는 편입니다. 이를 테면, 약간 괴상하지만 호감을 줄 수 밖에 없는 주인공, 달짝지근한 감성, 평이하지만 쉽게 공감을 끌어내는 문장과 세밀화를 보는 것 같은 묘사들.

이런 것들은 분명 작가로서의 장점이긴 한데, 그것들 자체가 소설 작품은 아니죠.

이야기가 주로 과거에 천착하고 있다는 점도 작가의 특기로 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관대해져도) 인물들의 과거는 ‘이야기’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사실, 과거의 경험들은 기획안의 인물표에 포함된 것들이죠.

 

결국 이 작품엔 ‘이야기’가 없습니다. 독자들이 읽고 싶어 하는 건 ‘이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이지 기획안의 인물표가 아니에요.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터뜨려 줘야 하는데, 이 작품은 인물들만 보여주다가 끝납니다. 이야기가 풍성하긴 한데, 얄팍하고 빈약해요.

 

 

히나코가 사는 곳은, ‘실버 타운’ 같은 곳입니다. 아파트 비슷한 양식에 단지 내엔 여러 유흥시설과 식당,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는 장소로 묘사되는데, 꽤나 돈이 많이 들게 보입니다.

직업도 없고 저금도 없는 히나코가 이런 곳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건, 두 번째 남편 덕입니다.

사실 작가가 씌워놓은 당의(糖衣)를 제거한 히나코는 호감을 줄래야 줄 수 없는, 도무지 공감이 어려운 인물입니다. 첫 번째 결혼과 세 번째 결혼은 그렇다 쳐도, 아들 둘(그것도 둘째는 갓난아이)을 버리고 애인과 도망간 행동은 어떤 핑계가 먹히기나 할까요? 이런 인물에게 주인공이라고 후한 대접을 하고 있는 작가도 그렇고 말이죠.

 

《반짝반짝 빛나는》 이후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읽지 않겠다는 다짐을 꺾은 건, 바로 제목에서 풍기는 묘한 울림 때문이었습니다. ‘등 뒤’는 시선이 닿지 않아 상상에 의존해야 하고, ‘기억’ 역시 올바른 이성과 정확한 지력이 가닿기 힘드니 편하고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되고 변형되기 쉽습니다.

제목만 봐서는 기억 이면의, 멀리 떠나온 것 같으나 사실은 바로 우리의 등 뒤에 존재하는 모종의 ‘진실’들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았던 거죠. 하지만 제목 그대로 이 작품엔 진실은 없고 오로지 ‘기억’들만 존재합니다. 작품은 제목 그대로 기억만 나열되다가 끝나요. 

 

또 낚였습니다. 애초에 그 미끼가 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가 아닌,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타이틀이었지만요.



사족 


적어도 제가 '문학 작품'에서 기대하는 건 이런 게 아닙니다. 남들이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