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다섯시 반에 멈춘 시계_강정규-리뷰

달콤한 쿠키 2018. 11. 12. 05:10


중학생인 인규는 이웃의 형들과 누나들을 따라 바다로 놀러갑니다. 해수욕마저 사치였던 집안 형편에 부모님은 반대하지만 손자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할머니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허락을 얻은 인규는, 어린 마음에 약간의 허영심이 발동해 (그 시절엔 무척 귀했던) 손목시계를 친구에게 빌려 차고 가게 되고 실수로 그것을 그만 화장실에 빠뜨리고 맙니다. 좌변기는커녕 수세식도 아닌 ‘푸세식’이 태반인 때였으니 그 안에 뭔가를 빠뜨리면 찾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죠. 하지만 그 일로 걱정을 하던 인규는 병까지 얻고 집안 어른들까지 알게 되고, 바야흐로 진짜 고난이 시작됩니다.




소설가이자 아동문학가인 ‘강정규’의 동화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위한 동화답게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으로 작가는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라도 이야기 속의 세계는 어른들이 사는 곳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냉혹하고 야멸찬 동화 속 세계는 그 대상이 어린이라 훨씬 더 잔혹합니다. 이 동화에서 보이는 인간의 욕망과 헛된 허영심, 그리고 소문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영향은 지금을 살아가는 성인 독자들에게도 대단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어린 인규가 허영심을 좇은 대가는 큽니다.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면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인규는 부모의 신뢰를 잃은 것은 물론, 아이의 이웃들은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로 아이게 ‘도둑’이라는 누명을 씌웁니다. 인규를 모함하고 그의 실수에 대해 루머를 만들고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는 양상은 우리 사회의 ‘가짜 뉴스’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확산되며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명확한 표본처럼 보입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끄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말대로 ‘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은 아니’므로 아이들은 어른들과 같은 세계 안에서 존재합니다. 어른들의 행동에 어떤 잣대가 주어진다면 그 세기는 다소 다르겠지만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의 세계가 냉정한 경쟁이 전부라면 아이들의 세계 역시 그렇습니다.


인규 역시 자신이 처한 세계를 그대로 경험합니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인 50년대 말 역시 인규 주변의 세상은 모함과 시기, 경쟁과 욕망이 득실거립니다. 인규가 상대해야 하는 악은 실체가 없습니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악의보다 무형의, 존재하지 않는 듯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악은 훨씬 더 막강합니다. 작은 실수로 인규는 난처한 고난에 빠지지만 인규 주변엔 (다행스럽게도) 악의보다 선의가 더 많습니다. 인규는 그 선의들에 의존해 난관을 빠져나옵니다.




작품은 한 개인의 지혜나 슬기보다, 개인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인규는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덕을 봅니다. 거짓과 경쟁이 난무하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결국 타인과 연대하는 일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지혜롭고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도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소재는 ‘똥’과 ‘시계’입니다. 특히 똥은 그냥 똥입니다. ‘배설물’이나 ‘대변’이라는 점잖은 표현이 아닌 그냥 그대로의 똥이죠. 작가가 작품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똥’은 오늘날의 똥처럼 더럽고 숨겨야 하고 피하고 싶은 대상이 아닌 주변에 흔하고 자연친화적이며 농사일 같은 일상에 유용한, 향수가 어린, 현대에 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의 그 ‘무엇’을 대변합니다.

반면 ‘시계’는 부유함과 허영, 욕망의 대상입니다. 현대 문명의 이기를 대표하는 그 무엇이죠. 똥 더미에 파묻힌 시계는 마치 과거의 향수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미래가 동시간, 같은 공간에 뒤섞인 혼돈(chaos)의 장(場)처럼 보입니다. 혼돈에 빠진 인규는 고민하고 건강까지 잃었다가 결국 주변의 선의에 의해 구조됩니다. 인규의 주변에 미미하게 존재하고 있던 선의는 똥(과거)에 직접 손을 담그고 몸에 묻힘으로서 비로소 작동됩니다. 인규가 고난에서 벗어나는 건 부차적인 결과입니다. 시계를 찾는 과정에서 인규는 삶에서 보다 값진 무엇을 얻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요즘 마치 숙제처럼 동화 몇 편을 읽으면서, 이 동화라는 장르가 반드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가에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의 독서엔 이해를 도울 어른들의 참견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동화가 어린이들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요. 어린이들과 성인들의 시각과 관점에 차이가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꼭 그런 건 아니지만), 동화는 오히려 성인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고, 그 핵심은 부모들을 먼저 자극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따지고 있자니, 동화는 오히려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창작의 주체가 어른이니 그럴 수 있겠다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도 과히 틀린 것 같지는 않고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작가로서 전전긍긍하는 것도 ‘괜한 노파심’이라 치부해도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