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 ‘엘스하이머’는 아내와 두 딸이 있는 중년의 남자입니다. 유복한 가정에 커리어도 훌륭해서 학계에서도 인정받는 그는, 어느 날 TV 강연에서 그를 봤다는 미지의 여자에게서 전화를 받습니다. 특별한 용건도 없고 막연하게 위로가 필요하다던 여자의 전화는 엘스하이머의 조용한 삶에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아주 단순히 보자면 이 작품은 ‘폰섹스’에 탐닉하게 되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음란한 취미에 빠져들고, 일상의 중심이 흔들리자 그것을 바로잡으려 고군분투하는 줄거리죠.
이야기에 좀 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엘스하이머의 고난은 권태로운 삶과 유혹이 넘치는 외부 세계와의 대립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엘스하이머는 한 개인의 순수한 내면입니다. 전화를 걸어오는 미지의 여자는 유혹과 자극이 넘치는 외부 세계죠.
한 개인으로서의 삶은 엘스하이머에게 더 이상 흥미롭지 않습니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세상은 좋은 아버지나 능력 있는 교수로서의 엘스하이머를 배반하지 않을 테니까요. 엘스하이머의 조용한 삶은 자기도 모르는 새 모험과 자극을 원하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낯선 여자의 전화는 지루한 삶에 엄청난 흥분을 불어넣습니다.
전화선 너머에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누군가의 모습은, 디지털과 SNS에 의존한 오늘날 소통 방식이 주는 ‘익명의 환상성’, 혹은 그것에 도사린 함정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또한 철학적인 이야기로도 읽힙니다. 엘스하이머에게 가장이라는 신분과 대학교수라는 사회적인 지위는 일종의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그의 본질과는 무관한,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혹은 사회가 강요한 동기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서 갖추게 된 모습이지요. 진정으로 바랐던 삶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과의 괴리로 고민했을 그는 한 여자의 전화로부터 시작된 일탈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로서 엘스하이머는 어느 대학의 잘나가는 교수, 어떤 저서의 저자,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버지라는 이름표를 떼고 순수한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작품은 총 세 장(chapter)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장은 유혹을 받는, 유혹에 넘어가는 엘스하이머를 그리며 두 번째 장은 그 유혹과 싸우는 모습, 마지막 장은 그 결말을 보여줍니다.
독자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엘스하이머의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성적 일탈에 빠져 타락해가는 중년남자를 볼 수도, 필요 이상으로 자극이 과잉된 사회가 한 개인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목격할 수도, 그리고 오롯이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곰곰이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겠죠.
결국 엘스하이머는 그 유혹에 굴복하게 됩니다. 엔딩은 무미(無味)하고 명료하지 않지만, 엘스하이머가 다시 그 유혹에 빠져들리라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어요. 이야기가 엘스하이머와 어떤 여자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거라면, 엘스하이머의 완벽한 패배인 거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존재하기 위해 옆의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반기를 들고 싶다면, 엘스하이머의 미래가 그리 암담하게 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전화에 대고 음란한 말을 속삭이고 있는 걸 아내나 딸에게 들킬 수도 있고, 쓰겠다는 책은 죽을 때까지 쓰지도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으로서, 교수로서의 명성에도 흠집이 나리라는 건 자명한 일이죠. 하지만 그게 과연 엘스하이머가 모든 것을 잃은 거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그것들이 한 개인이 잃을 수 있는 모두라면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요. 일탈과 자극, 유혹, 찰나의 쾌락에 모든 것을 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엘스하이머가 잃지 않도록 애를 쓰고 있는 것들에 모든 것을 거는 것 역시 무의미합니다. 한 개인은, 그 삶은 그렇게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이 작품의 열린 결말은 미묘한 여운을 가져옵니다. 읽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능성을 제시해 주죠. 아마도 책 밖에서 이어질 주인공의 삶을 상상해 보는 걸, 책을 읽는 즐거움들 중에도 최상위에 두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분명 좋아할 것이라 믿어요.
사족
1. 우연히 발견한 보석 같은 작품입니다. 읽을 책을 고르는 데엔 충분한 시간과 아주 약간의 우연이 필요한데, 여기에 적절한 운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죠. 이 책 처럼요.
2. 제목인 세이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수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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