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 물주기_일상, 기타

<시감상> 나_이기와

달콤한 쿠키 2018. 11. 21. 06:02





이기와


천형인 듯 옷을 입고 벗기를 반복하는 매음녀의, 나

다용도실에 시어머니를 가둬 놓고

감자처럼 쪼글쪼글 말라죽게 한 며느리의, 나

출소하는 날 위문편지를 주고받던 꽃망울의 여학생을

뒷산 동백꽃밭으로 불러내 꽃잎 갈기갈기 찢어놓고

휘파람 속으로 사라진 강간범의, 나

상습적 폭행에 못 견뎌 남편이 잠든 뒤

물걸레를 짜듯 목을 쥐어 짠 40대 주부의, 나

소나 말처럼 10년 동안 채찍에 길들여진

외딴 섬 노예 할아버지의, 나


나는 수백만 송이 다른 이름으로 발아할 수 있는

인자를 가진 씨앗이다

물과 공기와 빛의 조건에 따라

둥근 잎을 틔우기도, 가시를 밀어 올리기도 하는


9시 뉴스 화면 속

포승줄에 묶여 고개 떨군, 나와

화면 밖

소파에 누워 쯧쯧 혀를 차는, 나는

둘이 아니다


흉측한 몰골의 뿔애벌레가 천상의 오로라를 끌어와

비단명주나비로 우화(羽化)하는 순간은

둘이 아니다




『서정시학 시인선020』, 이기와 시집 《그녀들 비탈에 서다》 (서정시학, 2007년 刊) 중에서.




***



창녀, 살인자, 강간범은 내가 아니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가 남편을 학살한 아내나 노예처럼 부림 당하는 바보 천치 노인네도 내가 아니다. 그들은 뉴스 속, 혹은 영화나 드라마, 소설 속의 괴물들이다. 그들은 내가 아닌 동시에 내가 아는 사람들도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그런 악마, 그런 천하고 불쌍한 존재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나와 같은 땅 위, 같은 하늘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도 나처럼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범했을(혹은 당했을) 뿐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웃도 될 수 있고 친구도 될 수 있으며 가족도 될 수 있다. 그들은 아무도 아니면서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시인은 악(惡)에 대한 인식의 맹점, 의식의 습성을 경고한다. 우리는 불편한 대상을 우리 자신과는 다른 존재, 심지어 인간이 아니라고 믿어버림으로서 타자화시킨다. 내가 아닌 괴물이 된 그들에게 기계적이고 관습적인 감정을 가짐으로 스스로 우웛다 느낀다. 세상의 어떤 악과도 자신은 상관없다고 믿어버린다. 자신은 선하므로 안전하다고 위안 삼는다. 그렇게 우리는 악에 노출된다.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관대해진다.


우리가 목격하고 체험하는 악은 우리 밖에 있지 않다. 시인의 표현대로 ‘수백만 송이 다른 이름으로 발아할 수 있는 인자’는 바로 우리 내부에 있다. ‘물과 공기와 빛의 조건에 따라 둥근 잎을 틔우기도, 가시를 밀어올리기도 하는’ 모습은, 우리 인간이 상황에 따라 선한 존재가 되기도 악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는 범죄심리학자들의 의견과 맥을 같이 한다.




화면 밖에서 뉴스를 보며 혀를 차는 나는 언제든 뉴스 속의 창녀도, 못된 며느리도, 강간범도, 심지어 흉포한 범죄의 피해자도 될 수 있다. 애벌레와 나비가 같은 존재이듯이 그들은 우리이고 우리가 그들이라고 시인은 우리의 각성을 다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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