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락’은 과거에 사는 남자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목재소는 점점 몰락해가고 변화와 진화에 따른 적응을 도외시한다. 그는 물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현재’라는 시간으로부터 동떨어진 인물이다. 어쩌면 소외됐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런 데엔 스스로가 원했던 바도 있다.
그럼으로 그는 가족과 불화하고 단란했던 가정은 냉랭해진다. 아내와 자식들(오누이)과의 사이는 점차 소원해지고 아내의 요구는 잔소리가 되어 간다. 마을의 지적 장애아 ‘오도’를 대신 맡은 것도 처음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이젠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톨락의 강한 고집도 불화에 한몫한다. 그는 아내의 바람도 제안도 모두 무시한다. 자식들의 필요에도 눈을 감아버린다. 그러다가 그는 어떤 작은 사건을 빌미로 분노를 못 이겨 아내를 죽이고 암매장한다. 톨락의 불행과 물락은 어쩌면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범죄가 등장하지만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이 아니다. 톨락이 아내의 살인범이라는 건 비교적 초반에 드러난다. ‘오도’가 톨락의 혼외자식이라는 건 나중에야 밝혀지지만 눈치 없는 (나 같은) 독자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이 작품엔 많은 비밀이 있지만 작가는 그것들이 드러나는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작가의 목적은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니멀한 구성의 노르웨이 소설이다. 연극무대 같은 배경에 경제적인 플롯, 인물들도 단촐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작품 전체가 마치 잔잔한 호수 위를 노니는 백조 같다. 우아한 몸뚱이 아래 물 밑에서 미친 듯이 물을 젓고 있는 두 발을 생각해 보라. 격렬한 감정과 과장된 몸짓 연기, 외로운 방백으로 이루어진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작가는 이야기의 다른 요소들보다 ‘톨락’이란 캐릭터에 집중한다. ‘변화’라는 큰 물결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 인물이 사회로부터 부정당하고 반목하다가 끝내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다. 어쩌면 톨락이라는 불행한 남자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신(新)과 구(舊)의 대립, 경쟁과 도태, 불통의 결과로 몰락해 가는 세대의 자화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인물의 ‘분석’보다는 ‘보여주기’에 매달리는 이유는 한 세대의 몰락은 분석 따위 의미없는, 어쩌면 시간의 흐름과 사회 변화에 따른 당연한 수순이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삶 이후에 죽음, 번영 이후에 쇠락이 잇따르는 건 인간의 의지로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큰 그림이라는 생각에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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