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명의 고등학교 선,후배, 친구들이 여름방학의 9일 동안 합숙을 하며 학교 연극 축제에 쓸 무대의 배경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가스미라는 아이의 집으로 모입니다. 하지만 가스미가 살고 있는 ‘선착장이 있는 집’은 과거 10여 년 전의, 지금은 미궁에 빠진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곳이고, 다섯 명의 아이들은 그 사건에 대한 작은 단서들을 각자의 기억 속에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고 합숙이 진행되면서 그 퍼즐 조각들은 제자리를 찾기 위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죠.
과거의 살인사건과 제한된 인물들, 기억이라는 단서, 고립된 장소와 합숙이라는 설정. 호러 영화나 미스터리 소설의 완벽한 장치입니다. 마지막 장(章)에서야 모든 의문이 풀리는 건 미스터리 소설의 가장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구조이기도 하고요. 그런 탓에 이 작품은 미스터리 소설로 소비될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작가의 목표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무척 정교한 이 소설이, 그저 미스터리만으로 소비되는 건 꽤 억울한 일입니다.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많은 문학 장르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으니까요. 이 작품은 어른도 아이도 아닌 인물들의 마음을 그려낸 심리소설이기도 하고, 그들이 그 과거의 고통과 공포, 혼란을 뚫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성장소설이기도 하고, 그들의 사랑과 우정, 질투를 그린 가벼운 로맨스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온다 리쿠는 주로 미스터리와 환상소설, SF 등의 분야에서 많은 수상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온다 리쿠의 소설은 기묘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일본 이름을 외우는 데에 겪는 곤란 때문에 일본 작가들에 대해 알러지가 있는(핑계치곤 변변찮은) 제가 온다 리쿠의 소설은 찾아 읽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온다 리쿠의 작품들을 읽고 있자면, 작가의 기억이 분명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의 기억들을 독자들과 나누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작가와 엇비슷한 시기에 10대를 보낸 저 자신도 동시대의 기억이 있긴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많은 차이가 있지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말이에요. 그 기억들이 시대를 같이 한다고 해도 결코 같거나 많이 비슷하지는 않을 거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다 리쿠의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 장면들이 익숙한 듯, 어느 샌가 제 자신의 기억을 더듬게 됩니다. 지금은 너무나 멀리 지나쳐온, 그래서 더 아쉽고 그리운 과거의 순간들을요.
과거의 기억과 향수는 온다 리쿠가 추구하는 문학 세계의 핵심(작가의 특기이고 장점)입니다. 아련하지만 애매한, 몽환적인, 그래서 더 비밀스럽게 느껴지는 ‘과거’라는 단어는, 온다 리쿠의 작품 세계에서 그 모티프는 물론 주제, 플롯 등에 큰 영향을 주죠.
이 소설의 장점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바로 이 작품의 구조(이 또한 작가가 즐겨 쓰는 방법)입니다. 총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각 장마다 다른 인물들이 화자로 나와 그들만의 시각에서 과거를 바라보고 생각하고 서술합니다. 이런 ‘라쇼몽’ 식 구조는 인물들이 무대그림을 준비하고 있는 연극의 이야기와 겹쳐져 묘한 기시감을 주기도 합니다. 특히 완성된 무대에서 인물들이 모여 터뜨리는 클라이맥스는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 그 현장감이 생생하죠.
이런 구조는 작품의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각 장마다의 다른 화자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기억을 더듬고, 대상을 바라보고 관찰합니다. 인물들이, 결국 이야기가 추구하는 ‘진실’이라는 것도 각자의 관점과 입장, 사고의 틀과 방향에 따라 달라지죠. 그래서 ‘자신이 본 것밖에 믿지 못하고, 믿고 싶은 것밖에 보지 못하며,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이 바로 진실’이라는 작품 속의 대사는 특히 의미심장합니다.
결국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모종의 진실을 알려주지만 정작 소설 속의 인물들은 허방다리만 짚은 채, 오리무중으로 남겨 놓습니다. 특히 과거의 기억과 상처에 집착하는 가스미는 완전한 과거 사람이 되죠. 가스미는 무엇을 원했던 걸까요. 원하던 것을 진정 얻었을까요.
개인적으로 ‘과거는 늪’이란 믿음이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은 잊히거나 왜곡되기 쉽습니다. 게다가 기억으로 남는 과거는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 더 많죠. 사람들은 좋은 경험보다 나쁜 경험들을 더 기억하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과거란 것이 말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잊히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강한 트라우마를 남기는 기억이라면 그렇죠. 트라우마란 것은 경험해보면 그 상흔을 남기는 방식이 약간 특이합니다. 당시엔 별것 아니던 과거의 기억이 살다보니 그 아픔과 고통이 점점 더 커지는 경우도 있고, 몇 십 년이 지난 후 몇 십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날카로운 비수로 꽂히는 경우도 있고요.
하지만 거의 모든 경우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과거를 아쉬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를 제대로 살아가는 일이겠죠. ‘바로 지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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