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욕조_김희진-리뷰

달콤한 쿠키 2014. 3. 27. 17:48

 


욕조

저자
김희진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06-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가혹한 상상력으로 말을 거는 작가 김희진의 첫 소설집 강박과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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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희진의, 총 여덟 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입니다. 주목할 작품은 작가의 데뷔작이며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단편 ‘혀’이지요. 하지만 다른 작품들도 그에 못지않게 개성이 넘쳐요.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작품들은 각기 다른 색깔을 지녔지만, ‘관계’라는 주제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어떤 작품은 그 주제가 두드러지지만, 어떤 작품은 의미심장한 상징 아래에 숨어 있죠.

 

작가의 상상력은 거침없습니다. 가끔은 거칠어 보이기도 하고 리얼리티 같은 것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보이기도 하지요. 용감하고 우직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느낌은 매우 따뜻하고 내러티브는 어렵지 않고 집중이 잘 되며, 작품마다 서로 다른 개성을 갖고 있어, 그 전체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느낌이 들죠.

 

작품집의 포문을 여는 ‘혀’는 강한 메시지를 지닌 현실비판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입니다. 일종의 동화적인 분위기의 환상소설로도 읽히죠. 갑자기 사람들의 혀가 사라지고 의사소통의 수단을 잃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코미디 소동극, 혹은 진중한 주제를 비아냥거리듯 전달한다는 점에서 블랙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이야기의 설정은 약간 으스스합니다. 혀가 사람을 지배하고 신체에서 빠져나간 혀는 주인의 죄와 은밀하면서 바람직하지 않은 사생활을 폭로하며 돌아다니죠. 사람들은 결국 겁에 질려 죽음을 무릅쓰며 자신의 혀를 되찾는 데에 혈안이 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무책임하게 쏟아내지는 말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후회하지만 ‘혀의 복수’는 가차 없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캐릭터들은 캐리커처 수준이며 환상적인 설정에 필요한 핍진성을 부여하는 데엔 실패한 것 같아요. 주제가 너무 일찍 드러나서 짧은 분량임에도 다소 지루한 단점도 있고요. 하지만 ‘관계’ 안에서 ‘신중한 말 한 마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가의 메시지는 강렬하고 충분히 귀 기울일 만한 것이죠. 특히 온갖 거짓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요즘 같은 세상엔 말이예요.

 

작품집의 끄트머리에 실린 ‘붉은색을 먹다’ 역시 ‘혀’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제목 그대로 붉은색을 먹을 수 있게 된 주인공은 몸이 점차 붉게 변하며 소외와 차별을 경험합니다. 일상적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게 된 주인공은 온 세상의 붉은색을 모두 먹어치우기로 작정하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결국 세상엔 붉은색이 서서히 사라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붉은색의 존재는 사라집니다. 급기야 사람들은 붉은색을 부정하기에 이르러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우회적으로 생각하면 ‘특별하다’는 것과 통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특별함’과는 약간 다를지라도 그런 사실은 아주 가끔 또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결국 차별과 세상의 통속적인 기준에 이상적이지 않은 특별함을 경험한 주인공은 붉은색을 토해내어 다른 사람들까지도 붉게 물들이려하지만 그럴수록 스스로의 피부는 붉은색을 잃고 맙니다. 그렇다면 붉은색의 사람들 속에서 원래의 피부색을 되찾게 된 주인공은 행복하고 차별로부터 안전할까요? 이야기의 결말에 암시된 주인공의 미래는 그래서 암울합니다.

 

‘읽어주지 않는 책’에는 갓 데뷔한 작가가 주인공입니다. 작가로서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가족 때문에 주인공은 무척 의기소침한 상태입니다.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친밀해야 할 그의 가족들은 그의 소설을 읽으려고조차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무관심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마치 연쇄반응처럼요. 주인공 역시, 도서관에서 빌려온, 단 한 번도 대출된 적이 없는 책을 읽지 않고 있거든요.

이상적인 ‘관계’를 읽히지 못하는 책에 빗대어 말한 작가의 재치나 사건을 점점 키워가며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스토리텔러로서의 작가적 기량을 엿보는 것 외에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는 작가 김희진의 비밀스러운 통로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이 작품은 이야기 예술가로서의 고뇌를 토로하는 작가의 일기장을 엿보는 것 같아요.

 

‘해바라기 밭에서’는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입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향한 사랑을 고문이라는 과격한 행동으로 표출하는 주인공이나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상대가 만들어내는 일종의 고문극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재미있고 기발하며,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화학 작용은 마치 한 편의 사이코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극적 행동은 심리 분석의 좋은 텍스트가 될 것 같아요. 아주 독특하고 긴장감이 넘치는 작품이죠. 결말 즈음의 아주 작은 반전도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요.

 

‘욕조’와 ‘우리들의 식탁’은 가족 간의 관계, 특히 여성 구성원 간의 그것에 대한 우화입니다. ‘욕조’는 사실적으로, ‘우리들의 식탁’은 앞서 언급한 두 작품, ‘혀’나 ‘붉은색의 먹다’처럼 몽환적인 감각으로 완성했습니다.

‘욕조’는 노처녀인 ‘나’의 평범한 일상이 잔뜩 드러나 아기자기한 재미가 무척 많은 작품입니다. ‘나’의 외로움은 옆집 남자의 토끼로 대변되다가 눈사람, 죽은 삼촌의 파묘와 화장, 엄마를 거치며 결국 욕조 안에 안착됩니다. 이불을 깐 욕조 안에 누워 편안히 잠이 든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하면 자궁 안의 아기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그것에서 멀어지려면 일단 그것에 푹 빠져봐야 그 방법을 알 수 있고요. 작가는 그 외로움이 ‘소외’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살면서 만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관계’에 집중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주인공이 장난 전화에 진지하게 응대한 것처럼요.

 

‘우리들의 식탁’에 나오는 춘경과 고모는 유쾌한 커플입니다. 마치 만담을 이끄는 두 재주꾼을 보는 느낌이 들어요.

춘경은 괴상한 태도와 거의 병적인 식습관을 갖고 있는 고모를 비난하고 증오하면서 서서히 그녀를 닮아갑니다. 그 결과 처음에 그토록 거부했던 혈연의 관계를 받아들이기에 이르죠.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며 밀어내는 아이러니한 감정은 흔히 습관처럼 ‘애증’이라고 표현하지만 이 두 여자가 엮어내는 감정의 주고받음은 다른 단어가 필요합니다.

 

‘복도에서’와 ‘면도’에는 각기 외로운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끕니다. ‘복도에서’의 알랭 씨나 ‘면도’의 여자주인공은 도시의 회색에 잔뜩 질린 채 갇혀 있지만 외부와의 소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소통’에 대한 방편으로 알랭 씨는 ‘침묵’을, 여자는 보다 적극적인 ‘엿보기’를 택했지요. 알랭 씨는 침묵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자신 안으로 더욱 침잠해 가고, 여자는 자신이 결코 속할 수 없는 도시의 타인과 외부에 대한 질투와 스스로의 열등감으로 자신을 마음의 감옥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각기 다른 형태의 자극적인 동기가 옵니다. 알랭 씨의 독서를 방해하는 이웃집 아이와 ‘그녀’의 이웃인 커리어 우먼이지요.

두 사람은 자신들의 소통에 대한 욕구로 서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행동을 취합니다. 알랭 씨는 호기심을 적극적으로 표현했지만 여자는 그러지 못 했어요. 결말은 알랭 씨 쪽이 긍정적입니다. 적어도 알랭 씨는 작은 노력 정도는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거죠. 알랭 씨는 시끄러운 이웃에 반응하고 냉장고 자석을 계속 모을 이유를 받아들이니까요.

 

작가의 정보 없이, ‘욕조’라는 제목만 보고 읽기로 작정한 책입니다. 이 작품집에 실린 ‘복도에서’의 주인공인 알랭 씨가 그랬던 것처럼 욕조라는 평범한 제목이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했거든요. 그러고 보면 어떤 인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럴 듯한 제목을 뽑아내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