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은 80년대 대한민국. 주인공은 스스로도 인정하는 ‘속물 세무 변호사’입니다. 하루하루 밥벌이에 바쁘고 걱정하는 것이라곤 오직 자신과 제 가족의 안녕 뿐이지요. 지극히 개인적이고 평화스러웠던 그는 어느 날 공안 사건에 휘말립니다. 처음엔 인정으로 끼어들었지만 그 사건에 점점 더 깊이 관여할수록 그의 공정심과 정의심이 자극받게 되요. 알고 보니, 그가 발을 들인 사건은 당시의 군사 정권에 의한 대 국민 사기극이었던 거죠. 그는 피고들이 무고한 희생양일 뿐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들의 변호인을 자처하며 공권력에 맞섭니다. 하지만 재판은 이길 가망이 없고 그 일엔 큰 위험까지 따르지요.
줄거리는 이쯤 해두죠. 홍보도 충분히 됐고 많은 화제와 뉴스거리를 몰고 다녔으니, 영화를 직접 관람하지 않은 분들도 누구에 대한, 어떤 이야기인지는 대강 아시리라 믿어요.
관람을 마친 지금, 이 영화를 되새기자면, 감동이나 재미 이전에 강렬한 공분의 감정이 중요한 감상으로 남습니다. 이렇듯 이 영화에서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이야기의 영향력입니다. 구조를 파헤치고 드라마를 분석하는 것보다 이 영화를 대하는 가장 좋은 태도는 이 영화가 관객들과 사회에 파급하는 효과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일이지요.
영화는 이 영화가 실제 인물과 실제 사건을 토대로 했음을 알리는 자막으로 시작합니다. 그런 점이나 결말을 보여준 방법에서 특정인의 전기 영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가 정치적인 이슈를 몰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영화는 부조리한 공권력에 맨몸으로 맞서는 한 남자의 영웅적 서사보다 더 큰 데에 감동과 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살았던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는 데에 있지요.
가끔 우리는 암흑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 사회는 충분히 투명하지 않아요. 온갖 비리와 음모, 비밀과 속임수, 거짓과 파행 등등, 우리는 국민으로서 당연히 알아야 할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그것은 우리의 무관심 탓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충분한 정보와 자료가 주어지지 않는 탓도 있습니다. TV 뉴스도 신문도,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누군가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않나요.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의 어두운 현대사와 그로부터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두려운 현실을 다시 비추고 경고하는 시대극, 혹은 넓은 의미에서의 역사극으로도 보입니다.
주제적인 면에서 이 영화는 살면서 마주칠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두려운 것, 믿어야 하고 믿을 수밖에 없고 방금까지 믿었지만 한순간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서 우리를 위협하는 대상에게 느끼는 공포를 이야기의 모티브로 삼았다는 점에서 Mario Bava의 옴니버스 호러 영화 ‘I Tre Volti della Paura' 속의 한 편인 ‘브루달락’과도 맞닿아 있고요. 우리는 어쩌면 흡혈귀가 만연하는 시대를 사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영화를 정치적인 이슈로 삼으려는 시각들이 많지만 그 전에, 이 영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성의 회복’입니다. 인간성은 정치가 아닌, 인간의 보편적인 성정입니다. 개인이나 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제아무리 공익을 위한다고 외치며 절대 다수의 권리를 짓밟는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거죠. 당연한 말을 하는 영화라고요? 하지만 그런 보편적인 상식이 오늘날 우리에게 충분히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주위를 한 번 보세요. 당연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생기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 불가능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개인의 희생이 권력에 의해 얼마나 흔하게 강요되고 짓밟히는지 말예요.
나쁜 습관을 벗어나기 어렵듯이 실수도 반복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나쁜, 창피한, 옳지 않은 역사도 되풀이되죠. 더 멀리, 조정래 작가가 그의 어떤 작품 안에서 암시했듯, 우리는 그 날, 진정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너무 뜬금없는 소리인가요?
이 영화는 전기 영화이면서 역사 드라마이고, 법정드라마이면서 스릴러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펼쳐 보이는 여러 색깔들 중에서 어떤 것을 취하는 지는 관객의 몫이지요. 물론 이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점들이 보이기는 해요. 이야기의 비중이 가장 큰 법정드라마로서는 잘 나가다가 뒷심이 부족하고 마무리는 급작스럽죠. 스릴러로서는 더 할 수 있었는데 주저앉아버렸으며, 암울한 현대사를 조명하기엔 너무 개인의 드라마에 치우친 경향이 있고요. 구조적으로는 플롯은 평범하고 인물들의 개성은 너무 뻔한데다가 그들의 역학관계도 클리셰 투성이예요. 하지만 인물들의 동기는 설득력 있고 잘 짜인 드라마에 복선도 풍부하고 무엇보다 잘 한 건 이야기의 감동을 신파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배우들의 진정어린 연기와 그것을 이끌어낸 연출의 역량은 두말할 것도 없고요.
이 영화를 받아들이고 분석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관람객 각자의 몫입니다. 개인적으로 갖지 못한 것을 욕심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가졌던 좋은 것을 그리워하는 건 인지상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이 흐르는 것을 대체 어떻게 막을 수 있죠?
이왕 이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이 영화가 누구의 전기 영화라고 보다 당당히 내세웠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 봤어요. 대체 왜 아닌 척 한 거죠? 정치적인 이슈화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기획 단계에서 지금의 이런 즐거운 소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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