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비둘기
신경국
변함이 없다. 이른 새벽, 출근길을 나선 우리들을 맞는 것은 아침 해가 아니다. 밤이 남긴 끝자락의 어둠이 아직은 묻어있는 거리엔 온통 비둘기들뿐이다. 길가의 비둘기, 간밤의 취객들이 남기고 간 오물의 흔적들을 찾아 헤매는 도시의 떠돌이들이 우리를 배웅한다. 늘 그렇다.
오히려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하지만 비둘기들에게는 신경을 쓴다. 비둘기들이 모여 있는 곳은 더러운 곳이다. 사람들은 그곳을 되도록 피해가며 걷는다. 사람들은 비둘기들을 의식하지만, 그들은 우리들에게 무심하다. 온갖 욕을 들으면서도 우리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눈에 들어온다. 도시 전체가 비둘기들의 소굴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들의 망가진 모습은 다양하다. 절름발이도 있고 애꾸도 있고, 대머리에 아주 뚱뚱한 놈들도 있다. 닭을 모르는 아이들도 비둘기는 구별한다. 그들은 말을 배우기 전의 아이들에게도 익숙하다. 친근한 것이 아니고 익숙한 것이다. 작고 못생기고 더러운 새.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을 병균을 퍼뜨리고 다니는 위험한 새로 여긴다. 비둘기는 미움과 환멸, 기피의 대상이다. 미움과 두려움은 한 몸이다. 사람들은 비둘기들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비둘기들의 날갯짓은 위험해 보인다. 병균이 사방팔방 뿌려질 것 같다. 어차피 그들은 날개가 있어도 날지를 못한다. 날더라도 장거리 비행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멀리 날듯이 날개를 푸득거리기만 할 뿐, 나는 척하다가 금세 코앞에 내려앉는다. 아주 잠깐의 날갯짓도 힘든 눈치다. 그것은 그들의 본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자연이 준 자신들의 본능을 잃었다. 잊은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이다. 누구 탓일까.
비둘기가 도심의 무법자며 떠돌이가 된 데에는 설명과 이해가 가능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동물학자나 환경연구가 같은 사람이면 몰라도, 거의가 그런 것은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욕하고 비아냥거리고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신들이 언제 저 새들을 사랑했었는지, 자신들이 언제 저 새에게 ‘평화’라는 별명을 붙여줬었는지, 자신들이 언제 저 새들을 보며 평온함을 기원했었는지는 벌써 잊은 지 오래다. 사람들은 너무나 변덕스러워 뭐든지 금세 잊는다. 그리고 금세 적응하며 금세 서로를 닮아간다.
비둘기는 한때 ‘평화의 상징’이었다. 세인들에게 사랑과 우러름을 받던 새였다. 평온하게 하늘을 나는 새. 화합과 웃음, 행복과 안식을 날개에 품고, 그 날개로 온 세상을 나는 새. 전쟁과 폭력을 마다하고 영원한 평화에의 염원을 깃털 하나하나마다 새겨놓은 새. 또한 비둘기는 지혜롭고 영리해서 유능하고 요긴한 새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예이지만, 먼 옛날 전쟁 중의 전서구들을 보라. 그들은 용감한 전사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그들은 더러움과 불결함, 질병의 상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비둘기의 이런 신랄한 운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비둘기의 비틀린 생태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과학자들과 이론가들이 나선 적이 있다. 하지만 분석과 설명과 루머들이 나돌 뿐, 비둘기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은 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런 노력도 순간이었다. 마치 유행처럼 지나갔다. 도심의 비둘기는 커다란 이슈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명품이나 새로운 스마트폰, 연예인들의 스캔들, 정치가들의 비리, 재테크 같은 화제들엔 불나방처럼 달려들면서도 정작 ‘자연과 환경’에 관한 문제에는 무감각하다. 결국 사람들은 비둘기들을 돕는 것에 실패했고 그 대신, 초록의 비둘기들에게 콘크리트의 후미진 틈을 내어주고는 그들을 길들였다.
‘길들임’은 동전의 양면을 모두 가졌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비둘기들은 사람들에 나쁜 식으로 길들여졌다. 비둘기들은 사람들의 음식과 그들의 오물, 사람들이 사는 방식에 익숙해지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자연성을 빼앗도록 허락했다. 그들은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사람들의 이기적인 습성을 점점 닮아갔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위험한 비둘기들에게서 자신들의 모습을 본다. 그래서 더욱 그 작은 생명을 미워하게 된다. 그건 비둘기의 탓이 아니다. 사람의 탓이다.
고양이들을 보라. 그들을 의식하며 길에서 마주치는 길고양이들의 숫자를 세어보면 아마 놀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사람 손에 키워지다가 같은 손에 버려진 생명체들이다. 버린 이유도 다양하다. 늙어서, 병들어서, 많이 먹어서, 시끄러워서, 털이 날려서, 집이 좁아서, 이웃이 불평해서, 돈이 들어서…… 그런데 자신들 손으로 직접 버린 것도 모자라 이젠 미워하기까지 한다. 미워서 버린 것이 아니다. 버려져서 미운 것이다.
도심의 비둘기는 ‘훼손된 자연성’의 대명사가 된지 오래됐고, 천방지축 그들의 현재 모습은 마치 ‘자연의 경고’처럼 보인다. 훼손되어 비틀린 본성엔 늘 위험이 따른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자연에 손을 댈수록 그 경고는 강도를 높일 것이다. 자연이 병들면 사람도 병든다.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들리는 재해들, 가뭄, 때 아닌 폭우, 해일, 미세먼지, 불명의 바이러스, 그리고 범죄들, 점점 미치광이가 되어 가는 사람들. 비단 비둘기나 고양이의 문제만이 아니다. 하지만 우린 욕심이 너무 많아 도무지 자연을 가만히 내버려둘 줄을 모른다.
사람들은 자연을 살필 줄 모른다. 여유도 관심도 시간도 없다. 제 몸을 살피듯 자연을 살펴야 하지만, 요즘의 사람들은 제 몸 살피는 것조차 인색하고 어눌하다. 몸이 달아 있긴 하지만 요즘의 방식들은 기형적이다.
사람들이 진정 건강해지려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함께 해야 한다. 산을 깎고 땅을 파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음식을 먹고, 있는 그대로의 물을 마시고, 있는 그대로의 환경에 살며, 있는 그대로의 공기를 호흡해야 한다.
인간의 토사물로 잔뜩 배를 채운 비둘기는 만족스러워 보이지만 행복해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을 보고 생각하는 나의 관점 역시 이기적이다. 그들은 어쩌면 행복할는지도 모른다. 토사물을 먹든 산딸나무의 열매를 먹든, 우리와 마찬가지로 비둘기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비둘기가 행복해지려면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자신만의 고유성과 자연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하늘을 날아라, 비둘기야. 하늘을 꿈꾸지만 말고, 하늘에 살아라. 땅 위의 사람들 모두에게 너의 본모습을 다시 알려라. 그래서 병들어 가는, 그리고 폭력과 무관심, 편견과 아집으로 가득 찬 지구에 평화와 안녕이 깃들도록. 너는 원래 그러기 위해 생겨난 존재다.
'꽃을 쓰기_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연스러움에 대하여_2018 복사골 예술제 디지털 백일장 장려상 수상작 (0) | 2018.05.0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