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움에 대하여>
신경국
봄이다. 봄의 해는 겨울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피부에 와닿는 느낌도 다르고 사물을 비추는 방식도 달라 보인다. 육안으로도 겨울보다는 햇빛이 좀 더 두꺼운 것 같기도 하다. ‘봄’이란 계절이 주는 환상인지도 모르겠다.
만발하는 꽃, 움트는 초록. 요동치고 폭발하는 계절. 한 시인은 ‘대지가 기지개를 켜는 시기’라 했다. 가장 설레고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황사다, 꽃가루다, 조심해야 할 것도 많다. 하지만 요즘의 봄은 ‘반갑지만 위험한’이라는 오해를 벗었다. 미세먼지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 미세먼지 뿐이랴. 뉴스나 신문 지상엔 가히 ‘자연의 공격’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소식들이 드물지 않다. 구제역, 조류독감, 이상기온, 홍수와 해일, 슈퍼박테리아, 슈퍼바이러스, 기타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전염병들. 자연은 그 가공할 만한 힘으로 인간들을 위협하고 있다. 자연은 왜 우리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걸까. 왜 인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고 경외를 강요하는 걸까.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해다. 자연은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자연에 도사린 많은 위험들은 경고이다. 주의를 집중하면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를 보고 읽을 수 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자연은 인간을 적으로 삼고 해코지를 한 적이 없다. 태곳적 사고에 의하면 인간과 자연은 하나였다. 자연이 인간이었고 인간은 자연이었다.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 가장 큰 죄악이듯 인간과 자연은 서로를 아끼고 존중했다. 인간은 자연에 동화됐고 자연은 인간을 품었다. 자연은 여전히 인간을 품고 있다. 자연의 경고는 그 애정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품을 떠나려고 안간힘이다. 자연과 동화되길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오히려 자연을 도구로 삼아 이용하고 파괴하기 바쁘다. 산을 깎고 터널을 파고, 숲을 파괴해 콘크리트로 채운다. 공존해야 할 다른 생명체들을 구석으로 내몬다. 그들을 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의 먹이를 빼앗는다. 그러면서도 도심에 인공 숲, 인공 하천을 만들어 자연을 복원했다고 호들갑이다. 얼마나 모순인가. 생존 자체가 어려운데, ‘멸종위기’란 말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병 주고 약 주는 척, 시늉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업자득(自業自得)’,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했다. 자연은 그 말대로 자연(自然)스럽다. 악(惡)은 악으로, 선(善)은 선으로 대한다. 우리가 자연에게서 위협을 느낀다면 우리가 자연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안전이 위태롭다면 우리가 다른 생명체들의 삶과 안전을 위태롭게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간은 자신 외엔 안중에도 없었다. 이기적이었고 파괴적이었으며 방자했고 제멋대로였다. 그 또한 자연스러움이 아니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므로 인간 성질의 본질은 ‘자연스러움’이어야 했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았다. 어쩌면 부정하고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연에게 했던 행동들을 돌이켜보라. ‘문명’과 ‘편의’란 미명 하에 자행(恣行)돼 왔던 인간의 행동들을 곱씹어보라. 때때로 우리는 다른 인간들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포악(暴惡)’, ‘흉악(凶惡)’이란 단어로도 부족하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행한 일들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걸까.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찾는다면 조금이라도 괜찮아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동안 많은 방법들이 제시되었다. 그 중엔 어려운 것들도 있고 쉬운 일도 있다. 각자 삶의 영역과 패턴들에 그 답이 있을 것이다. 나는 몇 가지를 수년째 실천 중이다.
내 가방엔 캔버스 천으로 된 에코백과 십사 년째 쓰고 있는 스테인리스 스틸 제품의 텀블러가 언제나 대기 중이다. 에코백은 비닐봉지를 사용하지 않기 위함이고 텀블러는 일회용 컵을 마다하기 위함이다. 비닐봉지를 비롯한 일회용품이 지구에 끼치는 해악을 알게 된 건 꽤 오래 전이었지만 난 실행에 게을렀다. 그리고 지금은, 지구를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내가 가장 애를 쓰고 있는 것은 육식을 줄이는 일이다. 고기를 완전히 먹지 않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식물성 단백질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에 어느 정도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여전히 고기를 먹는다. 하지만 그 회수는 제한적이다. 일주일에 한 번. 그 외엔 육가공품이나 계란도 먹지 않는다. 외식할 때 어쩔 수 없이 먹게 되는 멸치나 육류로 우린 육수는 예외로 친다. 우리나라는 육식을 거부하거나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사람들에게 선택안은 별로 없다.
‘육식’의 문제는 인간의 섭식에 있어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는 화두 중의 하나다. 영양학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지구의 환경을 생각한다면 제한하는 것이 맞다. 육류를 생산하기 위해 배출되는 탄소의 양, 가축들의 배설물에 우리의 자연이 오염되는 정도만 따져도 이유는 충분하다.
게다가 육식의 증가는 채식의 환경에도 영향을 미친다. 위험 여부가 여전히 회자되는 G. M. 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 변형 작물) 작물은 원래 가축 사료의 대량 생산을 위함이었지만 결국 우리가 먹게 됐다. 특히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동물의 ‘복지’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 ‘동물 학대’ 수준의 오늘날의 사육 환경에서 동물들을 구하는 방법은 육식을 줄이는 일이다. 인간들은 식탁에 오르는 고기가 한때는 살아있어 지구에 공존했던 동물의 죽은 사체라는 사실을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
더 늦지 않았으면 한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진실이었으면 한다.
스스로 돌봤으면 한다. 뿐만 아니라 뒤를 돌아보고 주변을 둘러봤으면 한다. 좀 더 귀를 기울여 자연의 경고에 묻힌 신음을 들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함께 느꼈으면 한다. 인간은 이미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을 해치는 것은 자기 학대와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다. 착한 본성을 믿는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즉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나는 인간의 선의(善意)를 믿는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위로가 된다. 한 개인의 보잘 것 없는 행동, 작은 실천이면 충분하다. 지구는 우리의 자손들이 살아갈 터전이다. 계속 안일하게 있다가는 우리가 추구하고 이룩한 문명의 ‘이기(利器)’가, 한자어 그대로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부메랑처럼 우리를 노릴 것이다. 그건 마스크 한 장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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