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기_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_Deux Jours Une Nuit_2014-리뷰

달콤한 쿠키 2014. 12. 30. 14:35

 


내일을 위한 시간 (2015)

Two Days, one Night 
10
감독
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출연
마리옹 꼬띠아르, 파브리지오 롱지온, 필리 그로인, 시몬 코드리, 카트린 살레
정보
드라마 | 벨기에 | 95 분 | 2015-01-01
글쓴이 평점  

 

 

복직을 앞둔 ‘산드라’는 갑작스런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휴직 기간 중에 보너스냐 산드라냐를 두고 남은 동료들끼리 투표를 하도록 사장이 지시했고 그 결과가 대부분의 동료들이 보너스를 택한 거죠. 건강의 문제(우울증 치료)로 휴직했던 산드라에겐 어처구니없는 소식입니다. 와중에 산드라는 투표에 모종의 압력이 있어 그 과정이 정당하지 못했다는 정보를 듣고, 사장에게 재투표를 건의하고 승낙을 얻어냅니다. 재투표일까지 남은 시간은 주말인 이틀. 산드라는 동료들에게 보너스를 포기하고 자신을 택할 것을 설득하러 나섭니다.

 

‘극작법’이라는 분야에서 전문적인 용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가들이나 드라마 트루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리트머스’란 단어는 익숙합니다. 어떤 시약에 담갔을 때 변하는 색깔에 따라 그 용액의 성질을 알려주는 리트머스 종이처럼, 어떤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는 시험적인 특별한 (주로 선택의 문제가 따르는 진퇴유곡의) 상황을 ‘리트머스’라고 일컫곤 하죠.

최소한의 설정에 사건이라고는 해고 통보를 들은 산드라가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게 전부인, 무척 경제적인 이 영화는 이런 연속적인 리트머스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동료들은 보너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직을 반대하게 된) 산드라가 설득을 위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기도 하고, 불편함과 거부감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기도, 혹은 직접적이고 육체적인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고, 오히려 산드라를 설득시키려고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산드라’라는 캐릭터 자체가 이들에게 리트머스가 된다고 할 수 있죠.

 

이야기의 설정 자체엔 권력의 횡포에 대한 고발과 연대의 필요성 같은 정치적인 요소들의 씨앗을 품고는 있지만 영화는 그런 것엔 별로 힘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들은 거의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한 예로 휴직 중인 직원 한 명을 자르면 남은 동료들이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는 설정 자체가 비열하고 저속한 짓일뿐더러 작위적이죠. 만약 작정하고 나섰다면 이 영화는 무척 정치적인 영화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산드라는 투사가 되어 자신의 부당한 상황에 법의 힘을 빌기 위해 고군분투했겠죠. 산드라에게 호의적인 동료들도 노조 결성에 앞장서며 산드라의 복직을 도왔을 테고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가능성은 거의 내려놓습니다. 산드라를 포함한 모든 인물들은 그 상황을 그냥 받아들여요. 우스꽝스럽고 비겁하기까지 한 회사의 작태에 대항하여 이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요.

 

대신 영화는 ‘관계의 진정성’에 집중하며 관객들에게 ‘윤리와 도덕’의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나고 다니는 동안 그 자신이 접했던 그 많은 반응들 속에서 기쁨과 성취감, 실망과 배반의 아픔을 경험하며, ‘관계의 피상성과 그 안에서의 나’에 대한 통찰의 실마리를 얻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산드라는 개인을 초월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깨닫고 관객들은 자신의 가치관을 시험대에 올립니다.

 

이야기가 그리고 있는 갈등은 선과 악의 대립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필요와 우선순위, 가치관에 따른 선택의 문제에서 비롯되죠. 회사의 투표에서 산드라 대신 보너스를 선택한, 그 이후로도 산드라를 피하고 거부했던 사람들에게 악의는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보너스로 나올 그 돈이 필요했고 그 필요는 비교적 정당한 구실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그들은 나름대로의 최선의 선택을 한 거고, 그것이 산드라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다 준 것뿐입니다. 어느 누가 그들의 선택이 ‘틀리고 잘못됐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화 내내 동료들에게 ‘리트머스 적인 존재’였던 산드라 역시 나중엔 그 자신이 선택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그 입장에서라면 무척 솔깃했을 사장의 제안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는 산드라의 모습은 과연 용감무쌍한 전사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 장면은 관객들에게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을 것 같지만, 이 클라이맥스에 대한 다른 관객들의 반응이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했습니다. 산드라의 선택이 ‘영화적’으로는 옳았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떤지 확신이 잘 서질 않는 거죠. 산드라의 행동이 용감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만.

 

감독인 ‘다르덴 형제’가 이 영화 속에서 그려낸 현실은 우리의 모습들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이 사실적입니다.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어불성설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반은 포기하고 반은 잊으면서 꾸역꾸역 삶을 이어나갑니다. 부당한 현실이지만 평범하고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권력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거나 항상 ‘정의나 도덕, 양심’을 부르짖으며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게 항상 통하지도 않고요. 나름의 가치관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옳고 선함’을 지향하지만 왜곡된 현실은 유혹이 넘치고, 남을 위해 살고 싶지만 마음속의 이기심은 너무 강하죠. 그나마 자신에게 ‘왜?’라는 질문을 한다면 다행이지만 그조차 삼키고 외면하기 바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비루하고 소극적인 삶 속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주변 사람들과의 참된 관계가 주는 사랑과 행복, 즐거움과 만족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속의 일련의 상황들을 겪으면서도 결국엔 산드라가 웃을 수 있었던 것도 아마도 그런 깨달음과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의 존재, 진정한 용기의 발견이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요.

 

사족

실제로 우리 앞에 저런 숙제가 놓인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당연히 동료를 택해야지, 무슨 소리, 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을 별로 없을 것 같네요. 상황에 따라 다르니까요. 산드라처럼 매력적인 동료라면 모르겠지만, 그 상황에 처한 동료가 왕재수에 왕싸가지라면? 보너스가 오랫동안 염원했던 소원을 단번에 이룰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라면?

결국 이런 ‘윤리와 도덕’ 같은 까다로운 주제를 쉽고 재미있고 공감되게 풀어낸 재능은 타고나는 걸까요, 교육과 훈련의 결과일까요? 뭐가 됐던 부럽네요.

 

그리고 번역 제목은 나름 영리하게 들리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별로 들지 않습니다. 중의적인 제목이라지만 무슨 말장난 같아서 말이죠.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테마와도 동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