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안의 조명이 꺼짐과 더불어 화면에 던져지는 폭력의 여러 이미지들은 이미 충분히 끔찍하고 혼란스럽지만, 이들은 앞으로 관객들이 마주하게 될 사건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 화면들은 이후에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암시이고 일종의 경고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주인공인 ‘후지시마 아키카즈(야쿠쇼 코지)’가 소개되면 그의 고등학생 딸, ‘가나코(코마츠 나나)’가 실종됐다는 정보가 전달된다.
관객들은 경찰이었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직장을 잃고 가정이 붕괴된 후지시마의 눈으로 그 안의 세상을 바라본다. 후지시마는 불행했던 과거로 동료들과 식구들에게는 물론 세상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는 열등감과 패배감에 가득 차 있고, 항상 분기탱천해 있지만 몹시 지쳐 있는 사람이다. 그에 따른 울분은 그 자신을 세상에 적대적인 짐승으로 만들어, 그 스스로가 사라진 딸을 찾아 나서며 난폭함과 무차별적 폭력의 핑계를 만든다. 분노와 증오는 후지시마의 에너지다.
이 영화의 외형은 30~40년대 미국 대중예술계를 풍미했던 ‘하드 보일드(Hard Boiled)’나 ‘필름 느와르(Film Noir)’를 닮아 있다. 비열함과 냉정함의 정서, 관객들에게 가차 없이 들이대지는 폭력과 피의 화면, 악랄한 악당과 그에 버금갈 정도로 광포한 주인공, 팜므 파탈의 캐릭터, 그리고 그 안에 품은 범죄와 살인, 수수께끼가 그렇다. 후지시마는 ‘레이몬드 챈들러(Raymond Chandler)’나 ‘대쉴 해미트(Dashiell Hammett)’가 창조했을 법한 캐릭터들의 후손이다. 그리고 항상 우수에 젖은 ‘필립 말로우(Philip Marlowe)’보다 성난 종마 같은 ‘샘 스페이드(Sam Spade)’에 가깝다.
이야기의 시발은 여고생의 실종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영화 전체에 어마어마한 추진력을 부여한다. 실종된 가나코는 납치된 걸까, 아니면 스스로 사라진 걸까. 그렇다면 어디에 있을까. 혹시 살해된 가능성은 없을까. 이런 ‘실종의 미스터리’는 후지시마의 활약이 더해지면서 ‘캐릭터의 미스터리’로 전환된다. 가나코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고 이혼 후 절연하다시피 했던 딸의 사생활을 캐가던 후지시마는 자신의 딸이 과연 어떤 아이였는지, 어떤 딸이었고 어떤 친구였는지 의혹을 품게 된다. 딸의 행방의 실마리를 찾아 나선 아버지를 좇던 카메라는 어느덧 학교 폭력, 미성년(청소년) 범죄, 익명 뒤에 숨은 악(惡), 마약과 매매춘, 학원가에까지 드리워진 범죄 집단의 그늘, 폭력 집단과 결탁한 공권력 등, 사회에 만연한 온갖 악의 다양한 양상들을 비추다가, 급기야는 보다 은밀한, 인간의 내부에 초점을 맞추며 관객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영화가 끝날 무렵 관객들은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둡고 불편한, 그리고 사악한 부분과 마주하게 된다.
이 영화의 가나코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과거나 회상을 통해서만 보이고 설명되는 캐릭터다. 실체 없이 영화 속을 떠도는 망령 같은 인물의 비밀을 파헤친다는 이야기 장치는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레베카(Rebecca, 40년)>나 ‘조셉 맨키위츠(Joseph mankiewicz)’의 <지난여름 갑자기(Suddenly, Last Summer, 59년)>를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레베카 속의 레베카나 지난여름 갑자기 속의 ‘세바스찬’에게는 없었던 것을 이 영화의 가나코는 가지고 있다. 이 영화의 기저를 꿰뚫는 어떤 정서가 있는데, 그것은 ‘사악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나코에게서 흘러나온다.
영화는 인간 본성에 내재된 악마성을 가나코를 통해 형상화한다. 가나코라는 캐릭터는 ‘사악한 아이’라는 클리셰의 연장선에 놓여있는 듯 하지만, 단순히 그 전형성으로만 판단하기엔 무시하지 못하는 무게감이 있다. 가나코에게서 우러나오는 기괴함이 바로 그것이다.
가나코는 모습을 갖춘 악(惡)이다. 영화 속에서 설명이 다소 소외된 가나코는 지옥으로 변한 그 주변의 모습들에서 그 실재가 증명되고 존재감을 얻는다. 그늘의 깊이로 강렬한 태양을 반증하는 것과도 같다.
동시에 가나코는 철저하게 타자화(他者化)된 캐릭터다. 평범한 일상의 우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영화는 과거에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평범한 딸이고 여학생이었을 뿐인 이 아이를 무엇이 그런 괴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최소한의 힌트는 주지만 몹시 인색하다. 그래서 여전히 모호하다. 하지만 아이러닉하게도 그것이 가나코라는 캐릭터가 이야기 안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이유다.
영화는 한 인간이 악마가 되어 가는 과정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영화는 그저 악마를 보여주는 것에만 집중한다. 악마는 그냥 그곳에 있을 뿐이고 자신이 할 일을 묵묵히 해낸다. 사람들의 운명을 장악하는 그리스 신화의 ‘모이라이(Moirai)’들처럼 보이지만, 모이라이들이 사람의 운명을 짓고 삶을 관장했다면, 가나코는 타인의 운명을 농락하며 죽음으로 내몬다. 그 작은 악마는 주변 세계를 온통 쑥대밭으로 만든다.
가나코가 주변을 지옥으로 만드는 과정은, 왕따 소년(시미즈 히로야)의 모습을 통해 보인다. 이 아이는 가나코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소비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나코에 의해 짓밟히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다이내믹하게 보여주도록 설계된 캐릭터다. 일회성이 아닌, 빛나는 생명력을 부여 받았다.
관객으로서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 받아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 아이의 심리였다. 이 아이는 오랫동안 가나코에 대해 연정을 품어왔다. 그런 이 아이에게 가나코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몹시 컸을 것이고, 그 두려움의 무게는 아마도 가나코를 향한 열정과 맞먹었을 것이다. 동시에 가나코에 대한 욕망은 긴 시간 지독한 학교 폭력에 시달렸던 피해자가 가졌음직한 권력에 대한 욕구로 치환되고, 그 아이는 사랑하는 가나코에게 선택 받기 위해 ‘마츠나가’ 패거리들을 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잠시 서성거리다가 결국 끔찍한 운명을 맞는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가나코의 행방에 책임이 있는 인물의 정체는 약간 생뚱맞다. 서브 장르로서의 하드 보일드가 ‘후던잇(Whodunit)’ 장르에 대한 예의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예다. 복선이나 단서도 부족한데다 화면에 충실히 담지도 않았다. 아예 보여주지 않는 것과 보여주면서도 못 보도록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이 영화는 하드 보일드의 테두리 안에서는 강하고 솔직하지만 미스터리 장르에서는 비교적 나약하고 숨김이 많다. 그래서 관객들이 그 장르에서 기대하는 공정한 ‘지적(知的) 게임’의 여지는 별로 없다. 이런 점은 이 영화를 ‘하드 보일드 미스터리’ 혹은 ‘미스터리 스릴러’로 소비하려는 많은 관객들에게 단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보다 예민한 관객들에게는 다소 다른 이유와 방식으로 어필하길 바란다.
이야기 전체를 이끄는 후지시마는 물론이고 자신의 피붙이에게 총구를 겨누는 아빠, 딸을 위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엄마,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폭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하는 아이 등, 영화는 선뜻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즉흥적인 폭력과 살인으로 일관하는 악인들을 내세웠지만 궁극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은 ‘보편적인 선(善)’이었다. 고통과 비명의 암흑의 도가니 속에서 일말의 빛을 발견하는 카타르시스는 하드 보일드 장르가 천착하는 내러티브여 왔다.
이런 영화의 테마를 감안하고 제목인 <갈증>의 의미를 유추해 본다면, 폭력에 대한 갈증, 즉 폭력에의 탐닉에 대한 경고가 아닐는지. 때때로 우리는 단순히 폭력이 주는 가학적인 쾌감만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영화를 아우르는 피의 이미지는 곧 시각화된 폭력이다. 이 영화의 피는 생명의 피가 아닌, 죽음과 파괴, 끝으로서의 피다.
영화는 그 안의 모든 인물들을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으로 만든다.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들조차 서로에게 철저한 타인이다. 후지시마는 자신의 딸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때 느꼈을 후지시마의 절망감은 스스로로 하여금 자신의 내부를 향해 눈을 돌리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때 후지시마는 제 마음 속에서 무엇을 봤을까. 후지시마는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 비극을 마주하고 있는 관객들은?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그 앎이 제대로 된 앎인지 자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마음 속에 늘 악마를 품고 산다. 인간 본성에 잠재된 폭력성은 도덕성의 그 많은 주름 속에 꼭꼭 숨어 있어, 그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소름 끼친다. 하지만 평범한 상황에서라면 우리에게 작은 힌트조차 주지 않던 그것은 미미하지만 확실한 신호가 있다면 언제든지, 부지불식간에 깨어난다. 그리고는 우리의 이성을 뒤흔들고 양심을 마비시킨다. 우리는 언제든 괴물이나 악마로 변해 스스로를 먹어 치울 수 있다. 영화는 그 가능성(혹은 사실)을 환기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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