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기_영화

생각보다 맑은_2014-리뷰

달콤한 쿠키 2015. 2. 8. 12:33

 


생각보다 맑은 (2015)

Clearer Than You Think 
7.7
감독
한지원
출연
엄상현, 양정화, 한지원, 이홍수, 이호민
정보
애니메이션 | 한국 | 77 분 | 2015-01-22
글쓴이 평점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독립 애니메이션입니다. 현실에 고집스레 발 붙이고 있는 이야기와 뚜렷한 주제의식, 노골적이지 않고 잘 숨겨진 유머, 적절한 배경 음악 등이 잘 어우러진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두 번째 단편인 <사랑한다고 말해>를 제외한 나머지 세 작품에는 그 기저를 꿰뚫는 테마가 있어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일관되게 만들어주며, 그 정서는 <생각보다 맑은>이란 제목에 꽤 잘 어울립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감독으로서의 한지원이 아닌, 불확실한 미래에 갈팡질팡했던(혹은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는) 이십대의 청년의 모습이 떠오르죠. 그만큼 영화를 만든 사람의 경험과 고민이 잘 스며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체적으로 영화가 밝은 분위기는 아닙니다. 그런 감상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이십대 청년들(다른 세대들도 마찬가지지만)이 겪고 있는, 암울하고 고뇌에 찬 현실의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영화는 그런 현실에 희망의 불빛을 나약하게나마 비춥니다. 그 불빛은 ‘꿈’과 ‘희망’에서 나오는데, 그 빛이 비교적 강렬한 작품들이 이 안의 두 편, <럭키 미>와 <코피 루왁>입니다.

 

<럭키 미>와 <코피 루왁>은 같은 테마의 변주입니다. 솔직한 욕망이 이끄는 미래와 현실이 요구하는 미래 사이에 끼어 있는 인물들을 내세워 꿈과 희망의 소중함과 제 삶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이야기하죠.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전자보다 후자의 느낌이 더 셉니다. <럭키 미>가 현실의 고단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로맨스로 중화시켜 풀었다면, <코피 루왁>은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관객들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이죠.

특히 <코피 루왁>의 충격적인 클라이맥스는 상징과 은유로 처리했음에도 무척 충격적입니다. 실사가 아닌 그림이 그런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죠. 영화 전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마지막 작품인 <학교 가는 길>의 주인공은 ‘마로’라는 이름의 개입니다. 학교 간 주인을 찾아 집을 나선 마로의 짧은 여정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과정이 흥미롭죠.

상영 후 있었던 GV 현장에서 감독 자신은 이 작품에서 ‘자연에의 귀환’을 이야기하려고 했다지만, 그와는 달리 관객으로서의 본인은 다른 주제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위의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무게’를 우화적으로 풀어낸 것처럼 보였거든요.

마로가 산 속에서 만나는 다친 까마귀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귀찮은 현실입니다. 꿈을 꾸고 싶어도 희망을 갖고 싶어도, 그것을 위해 작은 노력을 하고 싶어도 현실에 매인 채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우리들에게 그것들은 어쩌면 사치죠. 하지만 마로가 한 순간 우연히 목격하게 되는 하늘을 나는 ‘하얀 새’처럼 꿈과 희망은 엄연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으며 언제나 우리를 기다려줍니다. 그것들이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것, 그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일말의 위로가 되죠. 사람이란 항상 꿈을 꾸는 존재이니까요.

이 작품을 본인은 가장 즐겁게 관람했는데, 관객으로서 개입할 여지가 많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여백이 있는’ 작품들에 더 관심이 가는 본인의 취향일 수도 있겠지요.

 

가장 짧고 경쾌한 드라마인 <사랑한다 말해>는 나머지 세 작품들과 비교할 때, 가장 이질적인 작품입니다. 직장 내의 로맨스를 스케치하듯 풀어낸 이 작품은 코믹한 캐릭터로 영화적 호흡을 고르는 소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정쩡한 설정과 캐리커처 같은 인물, 명확하지 않은 테마, 그리고 드라마적 진행에 리듬을 깨는 환상에 기반을 둔 클라이맥스의 삐걱거림은 약간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죠.

 

일반적이고 공감 가는 이야기, 귀기울일만한 테마로 대단한 성과는 아닐지라도 이 영화는 꽤 성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야기가 쉽고 재미있죠. 아쉬운 건 감독, 혹은 작가만의 ‘색깔’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야기적 발상을 자신의 경험에 국한시켰다는 작가적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것도요. 그 때문에 감독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상상력’이 가늠이 되지 않았거든요. 한마디로 이 영화의 단점은 ‘평이함’이고, 그건 결국 ‘개성’에 관한 문제인데, 그런 거야 뭐, 경력을 쌓아가면서 점차 나아지지 않겠나요. 이십대라고 힘과 패기가 철철 넘치다 못해 콸콸 쏟아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이긴 하니까요. 여러모로 차기작이 기다려지는 감독을 알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무척 흡족합니다. 누군가에 대해 기대를 갖는 것은 내 앞에 흥미진진한 미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한지원 감독의 건투를 빕니다.

 

사족.

두 번째 단편의 제목, <사랑한다 말해>와 연관하여 극 중 ‘은솔’의 갈등을 생각해 보면, 관객들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들어야만 속이 차는 게 여자’라는 편견을 만들어 낼 위험 요소가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퇴근 후에 약속을 하고 근사한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데이트를 하고, 혼자 먹는 초라한 밥상 앞에서 애인에게 전화로 외로움을 호소하는 행동들은 모두 그 사람이 그리워서, 즉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요?

역시 <사랑한다 말해>에서, 은솔의 목소리 연기를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GV가 시작되자마자 알겠더라고요. 목소리 때문만이 아니라 은솔이란 캐릭터가 워낙 독특해서 말이죠. 역시나 GV 자리에서 은솔의 목소리가 화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