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레슬러와 그들을 후원하는 한 명의 부호(富豪). 이 세 남자는 모두 이 영화의 주인공인 동시에 그들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다. 이야기는 ‘데이브와 마크 슐츠 형제에게’ 일어난 일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존 E. 듀폰에게’ 일어난 일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소재와 인물을 다루는 ‘태도’이다. 영화는 인물과 사건들에 거리를 두면서도 근접해 있으며, 인물들의 감정에 밀착해 있으면서도 안 그런 척 한다. 영화의 그런 태도는 우아하고 도도한 자태로 유유히 수면을 가르지만, 그 아래로는 미친 듯이 발장구를 치고 있는 백조처럼 보인다. 그런 ‘물밑’의 광경은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의 작은 디테일까지 잡아내려 그들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카메라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런 시선은 관객들로 하여금 엉엉 우는 아이를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뒷짐지고 빤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게 해, 가끔 짓궂게 느껴진다.
영화는 세 인물들을 모두 비중 있게 다루면서 그들 중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채, 시종일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런 거리감은 이야기로부터 관객들을 정서적으로 떼어 놓고 그들의 감정을 분산시킨다. 관객들이 어느 한 인물에게의 감정이입에 실패했다는 것은 극장 안의 어둠 속에서 그들이 정서적으로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종종 영화의 실패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소 예외이다. 이 영화가 갖는 ‘다큐멘터리의 질감’은 실화를 소재로 했다는 사실보다 그 재료를 다룬 영화적인 태도에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다수의 다큐멘터리들이 객관적인 척 시치미를 떼면서 어느 극영화 못지 않게 관객들의 감정적 동요를 목표로 하듯이 이 영화도 그렇다. 짐짓 꺼리는 척 하면서 내색하고 있는 이 영화의 건조한 질감은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관객들에게 이야기에 좀 더 냉정해진 채로 감정적인 반응보다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 전체적인 그림 분석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그 결과, 관객들은 거의 도발에 가까운 클라이맥스 앞에서 개인적인 감정이 배제된 ‘기계적인 목격자’가 되고 만다. 약간 특이하고 이질적인 감상은, 극 중 존 E. 듀폰의 성격과 묘한 대구(對句)를 이루며 꽤 강렬하고 긴 여운을 남긴다.
영화의 이러한 건조한 톤(tone)은 영화의 의도를 대변한다. ‘범죄’를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 대개 ‘선’과 ‘악’의 대립 양상으로 흘러가기 쉽지만 이 영화는 관객들이 그들만의 잣대로 인물들을 평가하는 것을 허락하지(혹은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존 E. 듀폰에 의한 데이브 슐츠의 살해 동기’에 대한 환경적이고 심리적인 단서를 나열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인을 매개로 한 드라마가 아닌, 살인 전의 드라마에 집중한다. 영화는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을 시간의 흐름대로 나열하는 평이한 플롯으로 전개되는데, 이는 관객들의 동정심이나 증오심에 호소하기보다 인물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차근차근 보여주는 화법을 택한 결과이다. 전체 러닝타임의 사분의 삼 이상을 할애하는 사건들, 즉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포석이며, 그 살인은 이야기와 감정이 중첩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심리적인 화학 작용’에 의한 일탈 행위로 여겨진다.
영화 속에서 살인을 저지른 자도 악인은 아니며, 죽임을 당한 것도 어리석음 때문은 아니었다. 이야기 속의 세 남자는 모두 넓은 의미의 ‘피해자’들로 볼 수 있다. 마크 형제는 국가에 영광을 안겨준 스포츠맨을 홀대하는 사회적 시스템의 피해자였고, 데이브 슐츠는 과도한 책임감의 피해자였으며 마크 슐츠는 피애망상(被愛妄想)의 피해자였고, 존 E. 듀폰은 그릇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의 피해자였다. ‘피해자’라는 입장의 대척 지점엔 흔히 ‘가해자’의 존재가 있지만 이들의 경우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실제로 우리의 주변에도 이런 ‘이유 없는 무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이는 종종 환경적인 요소들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맥락에서 이들은 ‘운명의 피해자’들이다. 운명이라기보다 우주를 장악하고 다스리는 섭리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영화 속의 살인은 ‘범죄’라기보다 그들의 운명이 묘하게 얽히고설킨 결과로 보인다.
영화는 그 비극의 시발점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마크가 존의 대리인으로부터 전화로 스폰서 제안을 염두에 둔 초대를 받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그건 순수한 의미에서의 영화의 ‘도입부’일 뿐이다. 소설 속의 진부한 표현을 빌자면 ‘어디서 시작됐는지 도대체 모르는’ 거다. 그것에 있어서 관객으로서 그저 상상만 할 뿐인데, 그게 물론 매력적이다. ‘여백’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듯이.
모든 인간에겐 욕망이 있다. 그것을 초월한다고 여겨지는 종교인들도 더 높은 깨달음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리고 ‘권력’에 대한 욕망은 거의 모든 욕망을 아우른다.
영화 속의 세 남자는 모두 권력을 향한 욕망에 시달렸으며 그것은 이야기 안에서 영향력의 문제로 표출된다. 마크와 존이 권력을 갖고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면 데이브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누군가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죽임을 당한다. 그들이 추구했던, 혹은 지키고자 했던 권력은 단순한 ‘힘’ 이상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받아들여지는 문제와 자신의 정체성, 자아의 독립,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은 완전한 자유와 관련된다.
마크 슐츠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기회라도 잡을 수 있었던 인물이었지만 그가 원한 것은 단순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아니었다. 형제가 나란히 84년, L.A.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던 데이브와는 달리, 마크는 사적인 생활에서의 성과도 없고 레슬링 외에는 잘 하는 것도 별로 없는 의기소침한 남자였다.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궁지에 몰려 잔뜩 위축되어 있던 마크에게 존이 제시한 조건들, 살 집과 훌륭한 음식, 좋은 훈련 환경과 고액의 연봉 등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회,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이루지도 갖지도 못한 것을 이루고 얻은 형과 스스로를 비교했을 때의 열등감은 마크에게 신발 속의 돌멩이 같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을 테고 그 앞에 존이 나타나자 드디어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랑스러운 동생, 훌륭한 레슬러, 모범적인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란 기대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데이브’라는 지붕을 벗어난 마크는 ‘존’이라는 새로운 지붕 아래 들어가 자신의 육친을 질투와 시기, 경쟁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데이브 슐츠는 여러모로 균형을 갖춘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그의 그런 점이 자신의 불행에 원인을 제공한다. 그는 ‘기회’나 ‘돈의 매력’보다는 ‘책임감’에 휘둘리기 쉬운 인물이었고, 그런 책임에 대한 의무감은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 자립적이고 강한 성격을 바탕으로 한,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권력에서 비롯됐다. 데이브의 강한 자기 신뢰는 타인에게 의존하기를 사양하고 스스로의 독립성을 고수하며, 자신이 인정하지 않거나 외부로부터 강요된 의견에 대해선 거부하고 끝까지 타협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면모를 드러낸다. 그가 짐처럼 짊어졌던 책임감은 동생에 대한, 가족에 대한,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고 존이 후원을 약속한 레슬링 협회를 향한 것이었는데, 그의 과도한 책임감의 배경엔 형제가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부모의 노릇을 해야 했던 맏이로서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동생의 설득에도 끄떡 않던 데이브가 나중에 마음을 바꾼 것 역시, 돈의 매력에 이끌려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고 존의 영향력 아래에 서기를 자처한 것이 아니라, 존이 제시한 조건들이 자신의 많은 책임에 따르는 내적인 두려움을 완화시켰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런 두 형제의 동기가 비교적 가시적이고 평면적이었던 것에 비해 존 E. 듀폰의 동기와 권력에 대한 욕구는 잘 드러나지 않고 좀 더 복잡하다.
존 E. 듀폰이 갖고자 했던 권력은 반드시 주위의 인정(認定)을 필요로 한다. 마크가 자신의 권력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내부를 향한 것이었다면 존이 바랐던 권력은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이 따를 때에야 비로소 만족되는, 외부를 향한 것이었다. 피상적으로는 이미 막대한 부와 높은 신분, 사회적 영향력과 권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존이야말로 권력지향적인,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를 절실히 원하고 있고 타인의존적인, 완전한 정신적인 독립을 이루지 못해 마음이 항상 시끄러운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는 권태로운 삶에 짓눌려 있으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는 개인적인 성정(性情)에 관한 문제겠지만 그의 가족사(史)적인 배경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존 E. 듀폰에게 있어 보다 가치 있는 조건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한 업적이 아닌, 태생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대대로 물려진 선조들의 영광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 뒤엔 ‘군수 산업’이라는 배경이 있고, 그의 조상들은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위선적인 ‘애국’에 빌붙어 거짓된 ‘평화’를 선전하고 결국은 오로지 자신들만을 위했을 ‘선의’를 액세서리처럼 과시하며 자신들의 비인도적인 살인 방조 행위에 대한 핑계로 삼았을 것이다. 그런 면면들은 단순히 친절하고 마음 넉넉하고 인심 후한 행동 이상의 깊고 진정한 사려는 어렵다는 내면적인 빌미를 제공했을 터였다. 우표나 조류, 특히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 등에 관한 존의 취미에는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되는 유한계급의 사람들이 눈을 돌렸음직한 기이한 취향이 엿보인다. 레슬링 후원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영지(領地)에 건장한 레슬러들을 불러모으는 것 또한 그러한 수집벽의 연장으로도 보인다.
더 재미있는 것은 존 E. 듀폰과 그의 어머니, 진 듀폰과의 관계인데, 존이 어머니의 진정한 아들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에선 진한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그 두 사람의 관계는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를 생각나게 하는데, 존 E. 듀폰은 평생 모친의 그늘에 있으면서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며 그녀로부터의 채워지지 않는 인정 욕구에 시달리는 노먼 베이츠와 닮은 구석이 많다. 존의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증오에 기반을 두고 그 증오 역시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 애증의 뫼비우스 띠 위에서 그는 평생을 그 아래에 있었을 어머니의 영향력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막상 그 그늘이 사라지자 당황한다. 노먼 베이츠가 죽은 어머니의 옷을 입고 여장을 함으로서 스스로가 망자(亡者)가 되기를 선택했다면, 존은 타인들의 보호자(아버지, 혹은 멘토)의 역할을 자처하며 그들에게 자신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일찌감치 고아가 된 슐츠 형제와 두 살 때 부모의 이혼을 겪고 이후로 죽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존의 공통점은 바로 ‘아버지의 부재(不在)’이다. 성장과정에서 ‘되비추기’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이 사람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구석이 있다. 데이브는 그 빈 자리를 자신이 메우려 적극적으로 노력했지만 존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아버지의 역할에 실패하자 더욱 엄마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자신이 직접 쓴 연설문을 마크로 하여금 읽게 함으로서 스스로 마크의 정신적인 아버지를 자처하고 나선 일이나 슐츠 형제 중에서도 ‘더’ 책임감이 있는 데이브를 ‘더’ 원하게 되고 나중엔 그의 행동에 ‘더’ 큰 배반감을 느끼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이 영화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퀴어 영화’로서의 가능성이다. 돈과 계약, 약속과 의무로 맺어진 세 남자의 서류적이고 피상적인 관계를 움직이는 정서적인 동기는 애정과 증오, 질투와 시기, 배반과 보복 등의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들이다. 멜로드라마의 일반적인 여성성은 레슬링이란 남성적인 소재와 주요 캐스팅이 모두 남자라는 사실 등에 살짝 묻히지만 그 감정의 소용돌이는 무척 격렬하고 심지어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사랑과 관심을 주고받을 수 있고 스스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시켜 줄 상대를 찾아 헤매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존, 그를 통해 위기를 벗고 겨우 기회를 찾았다고 안심하지만 경쟁자의 출현에 외면당하고 잔뜩 긴장하는 마크, 오로지 자신의 의무와 책임이 더 중요해 평정과 균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상대를 더 애 닳게 만들어 스스로 위험을 불러들이는 데이브, 이 세 남자의 드라마는 ‘삼각관계 로맨스’ 장르의 전형성을 갖췄다. 아마도 이런 극적 구도와 레슬링이란 스포츠에서 은밀히 드러나는 에로티시즘(언젠가 ‘빠떼루(parterre)’란 말이 성적 농담으로 사용됐듯이)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homo-sexuality는 이 영화가 올해 <Gay And Lesbian Entertainment Critics Association>의 주요 부문(Dorian Award; Film Performance of the Year)에 노미네이트된 사실에 대한 핑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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