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거짓된 진실_the Culture of Make Believe-리뷰

달콤한 쿠키 2015. 4. 5. 18:02

 


거짓된 진실

저자
데릭 젠슨 지음
출판사
아고라 | 2008-02-01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94930 반양장본 | 536쪽 | 223*152mm (A5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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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체가 언젠가는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예를 들면 종이나 연필,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것들도 그렇죠. 죽음이라고까지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갈기갈기 찢어진 종이나 닳아서 손에 쥐기도 힘든 몽당연필, 고장 나서 도무지 고칠 방법이 보이지 않는 가전제품들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취급을 당합니다. 쓸모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인간의 죽음을 ‘쓸모’와 연결 짓는 것은 꽤 부도덕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발상입니다. 윤리적으로도 그렇지만, 죽음 그 자체에는 어딘지 모르게 성(聖)스럽고 인간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으니까요. 사후의 세계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때에 맞춰 죽은 자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도 그런 경외감 때문이지요.

하지만 오늘날엔 죽은 자를 ‘쓸모’와 연결 짓지는 않아도 살아 있는 사람을 ‘쓸모’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쉽습니다. 가끔 우리는 상대방을 그의 연봉이나 차(車), 사는 집, 직업, 학벌, 토플 점수, (옷차림을 포함한) 외모 등의 ‘쓸모’로 판단합니다. 한 인간의 본질이나 내적인 아름다움은 거의 외면당하고 있지만 누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사고에 익숙합니다. ‘관습적인 사고’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요.

 

‘죽음’에 관해서 우리는 육체적인 죽음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신적인 죽음’도 함께 겪습니다. 육체적인 것은 일생에 단 한 번 뿐이지만, 정신적인 죽음은 거의 매일, 매 시간, 매 순간마다 찾아올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겪어내기 힘든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정신적인 죽음이 한 인간에게 더욱 치명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관점에서 지금을 사는 우리는 영화 속의 ‘좀비(Zombie)’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의 그 소재는 세월을 겪으며 많은 변화를 보여줬습니다. ‘자끄 뚜르뇌(Jacques Tourneur)’의 43년 作,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I Walked with a Zombie)>에서는 부두교 어쩌고, 하는 사전적인 의미의 (비교적 얌전하고 다루기 쉬운 환자 같은) 모습에 가까운 좀비가 등장했지만, 세월이 흘러 ‘조지 로메로 (George Romero)’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Night of the Living Dead, 68년 作)>에 나오는 것들은 거의 괴물이나 살인마 수준입니다. 그것들은 무척 빠르고 몹시 무섭고 살아 있는 사람의 생(生)살을 뜯어 먹으며 타인에게 자신의 증상을 전염시키지요.

현재 우리의 모습은 위에서 예를 든 두 영화 속에 나오는 좀비들의 양상을 모두 갖췄습니다. 육체는 살아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죽은 존재. 자신의 육체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존재. 타인이나 매스 미디어의 주술에 걸려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조종당하는 존재, 누군가는 먹고 누군가는 먹히고, 적자생존과 경쟁이 삶의 주된 목적과 패턴이 된 존재. 그래서 개성과 인간됨을 잃고 끊임없이 뭔가 이룩하고 성취하고 획득하길 추구하는 존재. 그게 삶의 전부인 존재. 그래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맹목적이고 슬픈 존재.

 

 

데릭 젠슨(Derrick Jensen)의 이 책은 현재 우리의 그런 모습을 일깨워줍니다. 우리 사회의 폐해(弊害)와 병리(病理)의 원인을 『증오』의 관점에서 풀어낸 책이죠. 저자는 우리 사회의 위기, 그 안을 살고 있는 우리를 고발하면서, 우리의 삶을 다독이고 때로는 채찍을 휘두르며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그 삶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도록 돕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고양시키며,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여러 가지 형태의 증오 범죄, 증오가 양산하는 사회적 병리 현상들을 예로 들다가 미대륙에 도착한 유럽인들의 인디언 학살, 노예제도,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잔학행위 등의 역사적인 굵직한 사건들로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갑니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의 ‘증오심’이 낳는 비극은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합니다. 현대에 진행되고 있는, 전혀 새로운 모습의 홀로코스트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과거보다 더 교묘하고 은밀한 양상으로 우리의 삶을 ‘학살’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저자의 주장이 무섭게 들리는 이유는 그 ‘학살’의 주체가 바로 (학살의 희생자이기도 한) 우리들 자신이라는 겁니다.

과거의 학살이 총과 칼 등의 무기로 상대방의 육체에 해를 가하는 직접적이면서 찰나적인 것이었다면, 우리에 의한, 그러면서도 우리를 향한 현재의 학살은 간접적이고 훨씬 긴 시간을 요구합니다. 오늘날의 학살은 종종 ‘산업’과 ‘생산’, ‘경제’ 등의 듣기 좋은 허울을 쓰고 있지만 그것들은 종종 인류뿐만이 아닌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작가는 그 결과를 ‘절멸(絶滅)’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작금의 우리는 모두 물질과 자본, 생산과 시장경제의 노예이며 우리 스스로는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경고합니다. ‘좀비’와 다름없는 현대인들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가 아닌, 조종되고 강요된 ‘욕망’만을 좇으며, ‘생산’을 통한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의 노예들로 개성이나 인간됨을 상실한 채 한낱 생산을 하기 위한 ‘도구’로 대상화(對象化) 됩니다. 그렇게 대상화된 개인들 역시 타인을 비롯한 자신 밖의 모든 것들의 본질은 무시한 채 그것들을 ‘수단으로서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그 대상은 ‘증오’의 대상이 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증오’의 원인과 배경은 ‘문명’에 있습니다. 문명은 시장경제 체제를 낳고 생산성 추구와 이윤의 극대화가 목적인 그 세계 안에서 불필요한 경쟁이 과도하게 양산된다는 거죠. 그런 배경에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을 살아내는 생명체가 아닌, 소모되고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지고 교체되는 수단으로 정체성이 결정되고 그 과정 위에서 ‘증오’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가끔 ‘증오’라는 감정이 삶의 에너지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시장 경제 사회에서 응당 향해야 할 곳을 찾지 못 해 방황하다가 더 편리한, 힘없는 목표물을 찾아낸다고 합니다.

주목할 것은 이 무대에서의 ‘정부’의 역할입니다. 저자는 ‘국가’나 ‘사법 제도’ 역시 증오집단으로 보고 있는데, 실질적인 정부는 생산의 주체인 ‘기업’이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치적인 정부는 명목 상의, 기업이 그 활약을 뽐내며 종(種)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인간과 자연을 소모시키고 권력과 자본을 그러모으며 온 세상에 활개를 칠 수 있도록 그 활동과 여건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경찰 같은 공권력의 역할은 두 말 할 것도 없죠. ‘정치적 위기에 개입하는 것’이 경찰력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인 기능이라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명확합니다. 그 ‘정치적 위기’란 것 역시 생산과 이윤 추구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추구하는 사회에서 어떤 것을 뜻하는지도 말이죠.

 

 

작가, 철학가, 글쓰기 선생인 동시에 사회 변혁 운동가이고 환경운동가이며, 한 개인으로서는 농부이며 벌치기도 한 저자의 프로필은 이 책의 목적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 책의 요지는 본문 속의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되죠. 『파괴와 착취, 증오가 문명의 토대이며, 문명이 주는 안락함과 고상함은 언제나 타인의 노예 상태, 비참함에서 나온다(본문, 141쪽).』 저자의 이런 주장은 ‘인류의 역사는 범죄의 역사’라고 말하는 ‘콜린 윌슨 (Colin Wilson)’의 주장과도 상통합니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변화의 시기엔 거의 반드시 유혈(流血)이 등장했고, 그런 피의 역사(전쟁, 살인, 범죄)는 성취나 업적에 가려질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문명을 이루고 문화를 영위하며 오늘날 여러 형태의 이기(利器)들을 이용하고 편리를 누리지만, 그러기 위해 그 이면에서 희생을 강요당하고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한 얼굴들의 존재는 거의 잊거나 모르고 있지요. 콜린 윌슨은 ‘역사적으로’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데릭 젠슨의 말은 훨씬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오늘날 우리가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편리하게 사용하면서도 공장에서 위험 물질을 다루다가 백혈병으로 죽어간 노동자들을 떠올리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의 근무 환경이 충분히 안전한지, 회사로부터 충분한 정보와 안전 교육을 제공받았는지,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장비들은 확보된 조건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거의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죠. 우리는 늘 커피를 마시면서도 바다 건너 저 멀리 타국 땅에서 한 잔의 커피를 위해 동원된, 교육이나 제대로 된 양육의 기회는커녕 노동의 올바른 대가조차 받지 못하는, 현대의 노예나 거의 다름없는 미성년 노동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그리고 이 한 잔의 커피에 대해 지불하는 나의 돈이 어느 나라의 전쟁 준비를 위해 쓰일 것이며 그것이 또 다른 죽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죠.

이런 건 어떤가요. 서울 도심의 화려한 빌딩 사이를 걸어 다니며 셀카를 찍고 쇼핑과 유흥을 즐기면서도 우리는 몇 년 전, 이곳에 살았지만 건물 부지 확보를 위해 쫓겨난 도시 난민들은 거의 기억하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전기를 사용하면서도 어느 도시나 마다하는 원자력 발전을 위한 송전탑이 생산성이 떨어지는 장소라는 이유로 제 고향에 세워지는 것을 반대하다가 만신창이가 된 할머니들을 생각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죠. 가족을 위한 저녁 메뉴로 두부전골을 준비하면서도 그 두부가 유전자 변형 콩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런 도처에 깔린 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 변형) 식품들에 대해 기업과 정부는 과연 국민들과 소비자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걸까요?

더 예를 들어보죠. 흙과 공기를 파괴하고 자연의 균형을 깨뜨리고 인간 이외의 것은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인 산업과 발전, 어리석은 정책들은 어떤가요? 개발을 빌미로 민둥산이 되어가는 우리의 아름다운 자연은? 물고기들의 무덤이 되고 있는 사대강 개발은? 아직 속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은 작년의 세월호 참사는? 아이들의 밥숟가락을 뺏어버린 정치인은? ‘불통’이 슬로건처럼 되어버린 이 시대의 정부는? 이런 비극들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주술을 걸어 좀비로 만들어버린 언론과 매스 미디어는?

 

‘증오’에 대해, 『문명화와 산업화,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한 생산의 신격화(神格化), 전쟁, 부와 권력의 집중, 다양성의 제거, 인간 개개인으로서보다 전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나’ 외의 것들은 수단과 자본으로 대상화, 타자화 시키는 이 사회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이 사회가 맺을 수 있는 단 하나 뿐인 관계가 바로 ‘증오’』 라고 정의한 작가의 주장(본문, 388쪽)을 반만이라도 믿을 수 있다면, 저자가 경고하는 현대판 홀로코스트가 저기 멀리서가 아닌, 바로 우리 코앞에서 천천히, 그렇지만 아주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저자는 이제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 때라고 말합니다. 그 방법은 ‘문명을 와해하는 것’일 텐데 저자 역시 그 방법을 모른다고 고백하고 있어요(이 부분에서 저는 온 힘이 빠져나가는 무기력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쉽게 손에 들어온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기 쉽죠. 아직 그 답은 모를지라도 노력할 여지는 많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고요. 선대들이 살생(殺生)의 방법을 알려줬다면 이제 우리는 후대들에게 상생(相生)의 방법을 알려줘야 합니다. ‘사소한 선의의 행동과 작은 실천’이 필요하겠지만, 이전에 ‘문명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조언합니다. 그 이후에 구체적인 방법들을 하나씩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어요. 스스로를 ‘좀비’로 만드는 것을 멈추고, 자신에게 주술을 걸고 있는 상대에게 ‘안 돼’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를 갖기, 타인과 사물을 정복하고 이용할 대상으로 더 이상 보지 않고 그것들과 협력하기, 스스로를 억압하여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기, 그렇게 ‘문명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찾으려는 혜안을 갖도록 노력하기. 기타 등등.

이 책의 원제인 <the Culture of Make Believe>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믿게 만드는 문화’ 정도가 가능하겠습니다. 그건 곧 ‘거짓을 진실로 믿게 만드는’, ‘우리의 이성과 의식을 마비시키고 긴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취급하고 다루려는 (개)수작’, 정도의 의미겠죠.

 

사회학과 심리학, 역사 등, 다방면의 학문적 요소들을 두루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그 성격과는 달리 마음에 깊은 감동을 남기며 독자들을 격양(激揚)시킵니다. 그래서 가까이 두고 거듭 읽고 싶은 책이죠. 우리의 현실을 똑바로 볼 용기가 없어 거울을 비추고 힐끔거리는 것만으로도 깊은 슬픔을 느끼지만, 때로는 ‘도대체 왜?’라는 질문에 그 까닭을 찾느라 그 슬픔 또한 묻히기 쉽습니다. 하지만 현상을 이해하면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어요. 이 책이 소중한 선물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점 때문이죠.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는 깨달을 수 있겠다는, 지금은 슬프지만 언젠가는 웃을 수 있겠다는, 지금은 행복한 척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진짜 행복한 순간을 살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주니까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영화 속 ‘좀비’와 다름없음을 깨닫게 된 것은 커다란 수확입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자신을 좀비로 만드는 주술에서 깨어난 순간, 우리는 이 시대의 모든 불행을 고쳐나가기 위한 귀중한 첫 발을 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이 책을 읽고 주술을 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올바른 의식으로 앞으로 나아갈 의지가 있다면 말이죠.

 

 

사족.

오늘 어떤 일간지에 세월호 희생자의 유족들이 받게 될 보상금에 대한 소식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더군요. 그들이 겪은 비극을, 그 슬픔을, 아니 우리 사회가 겪은 충격과 비통을 돈으로 환산하고 있다는 것에 경악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데자부(Déjà Vu)처럼 느껴졌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작년 4월, 사건 직후에 한 방송사에서 특보를 다루면서 비슷한 뉴스를 그래프까지 그려가며 보도했던 게 기억이 났어요.

 

냉정히 둘러보니, 그런 뉴스가 생소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디서 큰 불이 났을 때나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큰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을 때,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붕괴됐을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피해액’이나 ‘손실액’이었지, 공포에 질린 돼지들의 아우성, 수재민들의 슬픔, 화재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망연자실함은 뒷전이었죠. 심지어 희생자들의 잃어버린 삶과 꿈, 놓쳐버린 기회들조차 ‘숫자’가 되는 건 물론이고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는 ‘얼마짜리’일까. 이 사회에서의 ‘나’란 존재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 안에서 ‘나’는 어떤 ‘쓸모’가 있을까. 반대로 내 친구는 ‘얼마짜리’일까. 그 선배는 내게 어떤 ‘가치’가 있을까. 그 여자애는 어떤 쓸모가 있을까.

‘돈이면 다 된다’는 말이 이젠 더 이상 우스갯소리가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농담거리 하나가 줄어든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