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박쥐에게 편지를 쓰고, 박쥐는 꿀벌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꿀벌이 호랑이에게 보낸 편지는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옵니다. 우리 땅에서 호랑이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거든요. 하지만 돼지가 고래에게 편지 쓰기를 재개함으로서 릴레이 편지는 다시 시작됩니다. 편지는 돌고 돌다가 마지막으로 다시 인간에게 돌아옵니다.
이미 멸종되었거나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혹은 이 땅 위에서 그 생존이나마 무척 위태롭게 이어가고 있는 몇몇 동물들이 서로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허심탄회하게 속을 드러내기도, 때때로 자신의 한풀이도 털어놓습니다.
동물들을 의인화한 동화처럼 들리겠지만(이런 감상도 맞긴 맞아요), 이 책의 성격과 주된 기능은 보다 다양하며 실제로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이 책은 우선 생물학과 환경생태학에 관한 것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거기에 이 책에 등장하는 동물들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전달과 일반적인 편견과 오류 등을 깨는 것에도 적잖이 힘을 기울이고 있죠. 하지만 이 책이 대단히 개성 넘치는 읽을거리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 전문성에 그치지 않고 문학, 철학, 심리학, 영화, 사회과학 등의 주변 요소들을 폭넓게 아우르고 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 환경이 처한 심각한 위험, 나아가 우리 지구, 결국은 우리 인류 자신에게 돌아올 엄청난 재앙에 대한 자연의 미미한 사이렌에 귀기울여주길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모종의 경각심 외에도 우리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미안해지고 눈물이 납니다.
우리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면서 그런 척 해왔으며, 다른 생명체의 존재는 무시한 채, 지구 상에 오로지 우리들만 존재하는 듯이 살아왔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은 황폐해지고, 생태계는 파괴되었으며, 인간들인 우리조차 살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인간들의 생존조차 위협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래서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릴레이 편지의 마지막 수취인이 바로 다시 ‘인간’이 되는 이 책의 구성은, 우리의 모든 부주의하고 근시안적인 환경 파괴적인 행동이 가공할 만한 결과로, 마치 부메랑처럼,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경고처럼 읽힙니다.
저자는 ‘문명의 역사는 축척의 역사이며, 경쟁과 통폐합, 피의 역사’라는 말을 통해 우리의 문명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 책이 그리 많지 않은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지점입니다. ‘인간성의 회복’이야말로 저자가 궁극적으로 강조하며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이 책의 가장 큰 목적이기도 하고요.
저자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은 인간이 지배하고 다스리며 관리할 대상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야 할 동반자임을 강조합니다. 몇 년 전, 어떤 드라마에 나왔던 ‘암세포도 생명이다’라는 대사가 더 이상 ‘막장’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도 그 말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저자는 인간이 자연에게 하고 있는 일들은 인간의 권리가 아니며, 인류는 지구의 주인인 양, 행세하는 오만을 하루빨리 그만둘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자연 앞에 겸손해질 필요가 있는데, 다행히 우리 인류에게는 공통적으로 ‘공존을 지향하는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덕분에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기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 하니, 무척 위안이 되죠.
저자는 먼 옛날 공룡이 멸종하지 않고 ‘변화와 적응’을 통해 단지 그저 모습을 바꿔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의 모습으로 생태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인간이 주인인 지구가 아니라, 자연이 주인인 지구에 ‘변화하고 적응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거야 말로 인간이 지구의 주인임을 포기하고 지구 상 생태계의 한 지점을 겨우 차지하고 있을 뿐인 생명체로서 자연이 주인인 지구 안에서 ‘더불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거죠. 이젠 더 이상 인류가 환경을 변화시키고 자연으로 하여금 그것에 적응토록 강요하는 것이 아닌, 인류 자신이 야생(자연이 주인인 지구)에 적응하는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게 마땅한 자연(自然)의 의미이기도 하고요.
사실, ‘자연보호’라는 말이 이젠 무색하게 들릴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겐 어렸을 때부터 강조 받던 중요한 가치였죠.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라는 표어가 다들 생각나실 겁니다. 하지만 요즘, 그런 문구는 정치 선전의 색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도 그렇고,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가장 절실했던 부분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환경운동을 한다고 하면 마치 정치 운동이나 정치 선전을 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정치적으로도 진보 성향의 사람들로 취급받기 쉽다는 사실 말이에요. 그런 오해가 지구와 생태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하는 사람들의 올바른 의도를 호도(糊塗)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일반 대중이 환경 문제나 지구 생태계가 처한 심각함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런 편견에서 나온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원래 환경운동 자체엔 정치적인 색채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정치적인 논란에 휘말리는 것은 오히려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부러 만든 편견과 누명의 결과인 경우가 허다하죠.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정치적인 이슈가 개입되면 ‘환경운동’ 자체의 순수성을 의심받기 때문인데, 그 사람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우리나라에서 환경운동가들이 종종 ‘진보’, 혹은 아주 심한 경우엔 ‘빨갱이’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데릭 젠슨(Derrick Jensen)’의 저서 <거짓된 진실, the Culture of Make Believe, 2008, 아고라 刊>에 나와 있습니다.
데릭 젠슨의 저서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로. 제가 쓴 리뷰입니다.
http://blog.daum.net/soulflower71/266
데릭 젠슨의 주장을 요약하면 대강 이렇습니다. 이윤이 최우선의 목적인 기업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생산’과 ‘개발’이고, 그것에는 자연의 희생이 으레 따르기 쉽습니다. 그것이 종종 ‘자연보호’나 ‘안전한 생태계’의 가치와 상충하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생산과 개발의 주체인 ‘권력’과 ‘기업’에 반기를 들 수밖에 없죠. 하지만 환경과 지구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존재는 ‘부와 권력의 집중’에 방해가 되기 십상이고, 기업과 기업을 위해 존재할 뿐인 정부 측에서는 그 사람들을 적당히 무시하고 싶은데, 그런 방법을 찾다보니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결국 환경을 파괴하는 것도, 그것을 저지하려는 사람들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것도 ‘돈’의 원리에 의한 셈입니다. 하지만 지구와 환경, 생태계를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엄청난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은 ‘돈’에 의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환경운동가들은 이 시대의 진정한 ‘사마리아 인’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현재 우리가 살고 있고 앞으로도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지구와 그 생태계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하니까요.
공들인 화장에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은 사람이 제 아무리 아름답게 보여도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매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인공미인’이란 말을 듣습니다. 자연미가 없기 때문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환경도 그에 비유할 만합니다. 빌딩 숲 사이에 나무 몇 그루 심어놓고 우리는 도심 속의 자연이라고, 콘크리트로 만든 골에 물을 흘린 뒤 물고기들을 띄워 놓고 우리는 하천을 복원했다고 온갖 수선을 떨곤 합니다. 하지만 매연 가득한 도심의 환경 속에서 식물들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고, 복원된 개천은 콘크리트의 독성으로 물고기들의 무덤이 됩니다. ‘인공(人工)’이 아닌, ‘인공(人空)’인 거죠. 그 악마적인 느낌이란! 새삼스러울 것도 없죠.
‘환경운동’이라고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각자의 일상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참으로 많이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한 개인으로서 ‘환경과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대중교통 이용하기나 일회용품을 쓰지 않기, 전력과 가스를 아끼기, 샴푸나 세제 등을 사용하지 않기, 쓰레기 분리수거 같은 일에 동참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식탁을 채식 위주로 차리거나 원자력 발전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조금 더 많은 용기와 큰 결단이 필요하겠지만요.
지구를 위하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위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그것은 ‘부메랑’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지구와 환경을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환경 파괴적인 행동을 이쯤에서 멈추지 않을 때, 결국 그 해악(害惡)은 고스란히 우리 인류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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