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기_영화

스턱 인 러브_Stuck In Love_2012-리뷰

달콤한 쿠키 2018. 4. 17. 17:41


‘빌 보겐스’는 잘 나가는 작가이지만 삼 년 전, 잘 빠진 모델과 눈이 맞은 아내, ‘에리카’로부터 이혼을 당했습니다. 실연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냐 하면, 스토킹 무색할 정도로 아내의 집을 염탐하고 매년 추수감사절 만찬 식탁에 오지도 않을 아내의 자리를 마련할 정도입니다. 심각하죠.

 

빌의 딸, ‘사만다’는 매년 명절 식탁에 차려진 엄마의 자리를 보며 엄마에 대한 증오를 더욱 키웁니다. 사만다가 매사에 냉소적이고 사랑에 비관적이며 사랑 없는 섹스에 관대하고 찰나의 쾌락에 집중하는 것도 아마 그런 환경 탓인 것 같아요. 그런 사만다는 벌써 첫 소설을 출판한 문학계의 샛별입니다. 아마 아빠로부터 재능을 물려받은 것 같지만 아빠의 명성에 기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죠.

 

그런 누나에 비교하면 ‘러스티’는 순정파입니다. 안면 몰수하고 사랑을 찾아 떠난 엄마를 용서하는 편이죠. 순진한 러스티는 급우인 ‘케이트’에게 마음을 빼앗기지만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다가 수업 시간에 발표한 시로 케이트의 관심을 얻게 됩니다. 러스티 역시 아빠의 재능을 누나와 나눈 것 같죠.

 

이들 주위로 다양한 배경과 성격을 지닌 조연들이 등장합니다. 사만다를 짝사랑하는 ‘루’, 러스티의 여자친구가 된 ‘케이트’, 빌의 전처인 ‘에리카’의 새 남편, 그리고 이웃이면서 빌과 종종 섹스를 하는 ‘트리샤’ 등등.

 




영화는 진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목에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노골적으로 보이죠. 그런데도 이 영화가 관객들이 주의를 집중하게 만드는 이유는 그 주제가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관객들이 이 이야기에 공감하고 감동할 테죠. 크리스마스나 미국의 명절 시즌에 TV에서 틀어줄 만한 영화입니다.

 

또한 이 영화는 십대의 성장통, 불확실한 미래 같은 문제를 화두로 삼는가 하면,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갖는 힘, ‘관계’의 진정성에 대한 질문도 던집니다. 다분히 고리타분한 이야기이지만 이혼남과 유부녀 이웃과의 공공연한 섹스, 성에 대한 시니컬한 관점, 약물 중독 등의 도발적인 소재로 그런 약점을 커버합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감은 없어도 잔잔히 진행되는 이야기는 나름의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약간 지루합니다. 다양한 인물들, 많은 드라마를 내포한 그들의 배경을 제대로 활용한 것 같지 않아요.

이야기 자체나 배우들의 연기 문제가 아닙니다. 이 영화의 단점은, 한 마디로 기획의 문제처럼 보이죠.

이 이야기는 극장용 장편영화가 아니라 TV드라마 시리즈에 알맞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야기가 내포한 많은 가능성들, 많은 인물들과 다양한 소재, 다양한 시각들은 백여 분의 러닝타임에 우겨넣기엔 너무 과해 보입니다.

 

총총히 흘러가는 시간 탓에 영화는 충분히, 그리고 깊이 있게 다뤄야 할 이야기들을 마치 하이라이트 보여주듯 서둘러 해치웁니다. 그래서 힘을 주어야 할 부분도 성급히(얼렁뚱땅) 처리하죠. 그래서 영화는 강약 조절에 실패합니다. 비트(beat)가 없이 계속 반복되는 후렴구는 지루합니다. 멜로디와 화음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말이죠.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다소 헐렁한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겠죠.

 



빌이 에리카를 무모하게 보일 정도로 기다리고 있는 이유를 사만다가 알게 되는 순간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입니다. 소위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죠. 이 부분을 경계로 사만다와 에리카는 화해를 하게 되고, 갈등의 해소와 더불어 영화의 분위기가 반전되니까요. 그렇지만 영화는 해변에서 부녀의 대화 한 장면으로 그것을 처리합니다. 뭔가 급해 보이죠.

 

또한 빌의 두 자녀가 모두 작가가 되려는 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보이지만, 진심으로 아이들은 그것을 원한 걸까요. 아니면 부지불식간에 강요를 당한 걸까요. 에리카의 새 남편이 하고 있는 지적은 꽤 날카롭습니다. 사만다와 러스티가 어떤 틀 안에 갇혀 있다면, 그건 부모, 특히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빠의 영향이 크겠죠. 자신이 개척한 미래가 아니라 타인이 만들어 제공한 미래에 아이들이 만족할까요.

 

게다가 케이트는 영화 속에서 홀대를 당합니다. 러스티의 상대역으로 비교적 비중 있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말미엔 그냥 실종하다시피 합니다. 적어도 약물 치료를 받고 있는 케이트의 모습을 한 번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텐데 영화는 그러지 않습니다. 이런 퇴장은 마무리가 흐지부지한 정도가 아니라 캐릭터 하나를 아주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죠.

 



새롭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런 익숙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습관 처럼요. 익숙한 이야기는 편안함을 줍니다. 굳이 머리를 쓰거나 온몸을 긴장할 필요가 없어서죠. 자극과 기상천외함이 난무하는 이야기도 좋지만 이런 휴식 같은 영화도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블록버스터까지는 아닐지라도 꾸준히 관객들을 모을 수 있는 꽤 안정적인 기획이지요. 이 영화도 미국에서 크게 실패하진 않은 것 같지만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창작된 이야기의 성공 여부는 흥행이나 시청률, 판매량, 광고 수입 같은 것이 아니라 관객들(혹은 시청자나 독자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잘,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느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는 실패작처럼 보입니다. TV드라마로 여유 있고 느긋하게, 촘촘하고 깊이 있게 다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사족.

 

극 중, 러스티와 전화 통화를 하는 목소리는 진짜 ‘스티븐 킹(Stephen King)’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