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 해 연안의 섬, 안티아과에 사는 ‘리’는 십대의 소년입니다. 가난에 찌들에 돈 벌기에 급급한 엄마는 아들에게 필요한 지원을 줄 수가 없습니다.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는 리는 미국인 여행객 ‘존’에게 이끌리게 되고, 결국 함께 미국으로 옵니다.
하지만 이혼 당하고 아이들까지 빼앗긴 존은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입니다. 존은 리에게 자신의 분노를 나눠주며 아이를 살인 기계로 만듭니다.
암울한 영화입니다. 끔찍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영화는 섬뜩하기보다 서글픕니다. 부자(父子)로 행세하며 세상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두 남자를 바라보는 카메라엔 어떤 감정도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텅 비어 있어 외롭습니다. ‘존’의 말대로 ‘아무리 엿 같아도 계속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한 회의가 저절로 듭니다.
2002년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총격 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폭력’ 그 자체에 방점을 두진 않습니다. 그보다 두 인간 사이의 권력과 영향력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읽어냅니다. 무엇이 ‘리’로 하여금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그것도 아무런 목적이나 동기도 없이 눈 하나 깜짝도 않고 살인을 저지르게 만들었을까에 집중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리는 존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게다가 그를 따라 생전 처음 발을 들인 미국이란 나라는 어린 리에게 그냥 ‘낯선 나라’에 불과합니다. 존 옆에서 리는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존 외엔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리는 존에게 모든 걸 의존합니다. 결국 존은 리를 조종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리를 통해 얻어냅니다.
리는 존을 따라 미국으로 오는 순간부터 그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합니다. 타인에 대한 영향력은 ‘관계’가 성립되면서 자연스럽게, 시나브로 발생하지만, 그 영향력이 누군가의 의지를 ‘통제’할 정도로 막강하려면 ‘철저한 의존’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영감을 받는 것처럼 긍정적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리에게 드리워진 존의 영향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로빈 스턴(Robin Stern)’은 ‘권력과 영향력’에 관한 자신의 저서, 《가스등 이펙트(the Gaslight Effect)》에서 타인의 영향력에 노출되기 쉬운 조건으로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구’를 들었습니다. 이야기 속의 리는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그립고 자신이 소속된 가족, 혹은 가정의 존재가 늘 아쉬웠던 아이였습니다. 우연히 만난 미국인 여행객이 그런 리에게 손을 내밀자, 리는 그것을 덥썩 잡으려 모든 걸 그에게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리는 존에 의해 서서히, 스스로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주고 그의 꼭두각시가 됩니다.
리에 대한 존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는 엔딩에서 확인됩니다. 구속된 리에게는 자신의 손에 죽은 사람들에 대한 후회나 죄책감, 자신의 행동에 대한 회의 같은 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리는 오로지 존의 안전과 행방을 궁금해 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단순히 보살펴주고 관심을 가져주고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타인의 의지를 조종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이 영화에서처럼 그 결과는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그 이전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전반적인 조건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리는 소외된 아이였고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였습니다. 나약한 심성이 악(惡)을 부릅니다. ‘나’의 본질이 모호해질 때 타인의 나쁜 영향력이 우리의 인격에 침입합니다.
메시지가 무척 중첩적입니다. 외부의 ‘폭력’을 다룬 이야기는 결국 ‘나’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악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스며들 작은 틈을 노립니다.
하지만 그 틈이 만들어지는 게 오롯이 개인의 탓일지는 의문입니다. 낮고 얄팍한 자존감은 어느 정도 교육과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리에게 닥친 위험도 ‘가난’과 ‘양육’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리의 집안이 가난하고 엄마가 돈을 벌러 장기간 집을 비우는 건 그들이 나쁘거나 게을러서가 아닌 건 분명합니다. 우리에겐 옳지 않은 것엔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부족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족
인간을 숙주로 삼는 외계인을 다룬 무수한 SF 영화들 역시, 이 영화의 주제를 교묘히 비튼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은 ‘관계’와 ‘영향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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