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르’는 십대의 아이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에 갈 나이는 아직 안 된 것 같은데, 배우 ‘Zoé Héran’이 열두 살 때 이 영화를 찍었으니, 그 나이로 짐작해 봅니다.) 평범한 중산층 부모를 둔 로르 역시 평범합니다. 부모와도 사이가 좋고 개구쟁이 같은 면도 있고, 아직 어린 여동생 ‘잔느’도 잘 돌봅니다. 이 아이가 다른 아이와 약간 다른 게 있다면, 새로 이사 온 동네의 이웃인 ‘리사’를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로르는 리사에게 자신을 ‘미카엘’이라고 소개하며 남자아이 행세를 합니다.
로르의 세계는 아직 단순합니다. 좋아하는 감정을 굳이 마다하거나 그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같은 여자아이라도요. 이름을 속이는 걸 보면, 로르는 자신의 정체성과 외부의 시선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보다 익숙한 ‘사회적 관습’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정체성’이란 단어도 이 아이의 세계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로르가 고민하는 건 같이 수영하기로 한 친구들을 어떻게 하면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까, 같은 문제입니다.
어른들의 세계였다면 동성을 좋아하는 감정이 대단한 갈등이 되었을 테지만 로르는 그 사실을 심각하게 여기질 않습니다. 그저 제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할 뿐이죠. 이 아이의 감정이 갈등으로 불거지는 건 어른들이 그 사건에 개입되는 순간부터입니다.
타인을 아무 조건 없이 좋아하는 감정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순진한 아이들의 사랑은 유치하고 철이 없어 보여도 어쩌면 어른들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숭고해 보입니다. 그들이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해도 사랑은 누군가 그 방법을 가르치거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자유로이 흘러 가닿는 곳에 사랑이 머무릅니다. 사랑을 가장 사랑답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어쩌면 어른들이 아닌 아이들인지도 몰라요.
‘순수한 사랑’이라는 명제 아래, 어찌 보면 성정체성의 문제 역시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어쩌다 마음이 흘러 가닿은 곳이 그곳일 뿐이니까요. 배운 방법대로, 혹은 제시된 방향으로 움직이는 마음은 이미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자유를 빼앗긴 마음이 어렵사리 어딘가 가닿더라도 ‘진짜 사랑’이 머물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을 대체한 다른 감정들을 우리는 사랑이라 포장하고 속고 속이고 있는 거죠.
어찌어찌해서 로르가 미카엘이 아니라는 사실이 발각됩니다. 이후에 보이는 엄마의 반응은 눈여겨 볼 만합니다. 엄마는 로르가 같은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것보다 자신의 이름을 속인 것을 문제 삼습니다.
한 개인에게 이름은 한낱 고착된 별 의미 없는 고유명사에 불과할 수 있지만, 누군가를 무리로부터 분리하여 개별성을 부여받고 독립성을 유지하며, 누구도 아닌 ‘바로 나’임을 표방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사용하기 쉬운 수단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사회적 상징’ 같은 거죠.
엄마는 딸이 보이는 도착된 애정, 혼란스러운 성정체성이 아닌, 오히려 스스로 떳떳하지 못했음을 질책합니다. 로르는 가짜 이름을 만들어냄으로서 그 뒤에 숨어버리고 스스로를 변명하고 보호하기 위해 타인에게 속임수를 동원합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척하기 바빠 오히려 비겁자가 된 거죠. 스스로를 다른 모습으로 포장하는 건 무의식적이고 소극적인 ‘자기비하’이기도 합니다. 엄마는 딸의 그런 모습이 가장 못마땅했을 테죠.
엄마의 이런 훈육은, 어찌 보면, 성소수자 자식을 둔 부모의 가장 현명한 대응이기도 하고, 성소수자들에게 ‘커밍아웃’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껍질 안에 자신을 가두고 그 역할을 연기하느라 평생을 허비하는 게 성소수자들에게는 얼마나 지독한 고문일까요.
결국 로르는 리사에게 다시 용기를 냅니다. 진짜 이름을 말하면서 화해를 요청하죠. 리사의 입장에선 ‘용서’를 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여기는 정도보다도 훨씬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엔딩은 아직도 ‘벽장 안에 갇혀 있는’ 이 시대의 많은 성소수자들에게 커밍아웃을 독려하는 영화적 메시지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야트막히 흐르는 시냇물 같습니다. 일정한 유속에 큰 흐름도 없이 평탄한 경사를 유유히 흐르죠. 하지만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각도는 다양합니다. 한 소녀의 성장드라마로서 봐도 좋고, 아기자기한 청소년 드라마, 혹은 훈훈한 가족드라마로 봐도 좋고, 커밍아웃 같은 센 주제를 부드럽게 포장한 퀴어영화로 봐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어떻게 보든 마음에 남는 건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언제나 바로 나, 자신일 것. 다른 모습으로 포장하거나 거짓 뒤에 숨지 말 것. 흔하게 들은 말이지만 여전히 관념적으로 들리는 건, 완벽히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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