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자본과 시장 장악력에 따른, 소위 주류 문학계로 불리는 신춘문예 시장에 퀴어 소설로 첫 폭죽을 터뜨린 ‘김봉곤’을 만난 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여기 ‘박상영’이란 작가를 알게 된 것도 큰 행운이었습니다. 데뷔 작품은 그저 그런 이성애 서사였지만, 박상영은 퀴어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삶을 관찰한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라는 다소 긴 제목을 달고 있는 작가의 작품집은 퀴어소설을 비롯한 다양한 색깔의 작품들을 싣고 있습니다.
작품집의 포문을 여는 단편,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은 술술 잘 읽힙니다. ‘말발’이 좋은 친구가 청산유수로 쏟아내는 수다를 듣는 기분이 듭니다. 딱 넘치지 않을 만큼만 채운 술잔처럼 아슬아슬한 때에 절제된 감정이 작품의 전반적인 톤(tone)을 주도합니다. 지나치게 과잉된 감정으로 자칫 신파로 흐를 여지가 있는 소재이지만, 작가는 냉정하게도 자신의 인물들과의 거리를 적절히 유지합니다. 다소 엉뚱한 곳에서 발휘되는 작가의 유머감각은 작품 전반에 경쾌하고 발랄한 템포를 부여합니다. 쉽고 익숙한 단어, 호흡이 짧은 문장 역시 작가의 개성에 일조합니다.
반면 이야기가 피상적입니다. 무언가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다 읽고 나면 뭘 읽었는지 기억나는 게 별로 없습니다.
인물들만 보더라도 피상적인 이미지의 나열로 일관됩니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에피소드들 또한 맥락이 없습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재미있지만 어떤 의미 있는 큰 그림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제제’는 허영이 심하고 마사지를 빌미로 한 성매매에 종사하며 외모에 집착합니다. 제제의 가정은 엉망진창이지만 그런 것엔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족들과 사이가 안 좋았던 걸까요.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사라진 부모들은 제제에게 어떤 존재였을까요.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제제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제제는 행복했을까요. 그의 허영과 소비에 그의 가정사가 어떤 영향을 주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화자인 ‘나’ 역시 불투명하고 얄팍한 인물입니다. 과거에 사랑했던 ‘Q’라는 인물을 아직 못 잊고 있으며, (화자의 꿈에 의하면) 여전히 그 영향 아래에 있습니다. 게다가 ‘나’는 ‘Q’와 자살을 시도한 전력이 있고(그것도 여러 번), 연인은 성공했지만 자신은 살아남았습니다. 제법 뭔가 있어 보이는 ‘나’의 사연은 정보가 더 있지 않는 한, ‘우울한 게이, 핍박받는 동성애자’의 클리셰에 불과합니다.
퀴어 서사에서 이런 인물들은 꽤 위험해 보입니다. 보통의, 평범한 이성애자 독자들에게 퀴어들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를 만들고, 그것을 고착하고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매매에 종사하고 명품과 성형수술에 돈을 펑펑 쓰면서 유부남들과 사랑에 빠져 질척대는 모습은 퀴어들의 보편적인 모습이 아닐 겁니다. 수회에 걸친 자살 시도에 그것도차 제대로 해내지 못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무나와 위험한 섹스를 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인물들은 충분히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퀴어들도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작품 전체가 소재에 대한 설명과 설정으로 일관된 느낌입니다. 이 작품의 문제는 동기와 개연성의 문제이면서 설정 이후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전무하다는 겁니다. 작가의 수다스러운 글발은 유혹적이지만 공허한 이야기를 감추는 수단처럼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부분은 두 인물 사이에 존재하는 성적인 긴장감이었습니다. ‘나’는 제제를 좋아하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게 사랑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일종의 감정적 화학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Q’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제제는 ‘나’에게 버거운 상대이며 제제에게 ‘나’란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나’는 제제의 애정행각에 회의적입니다.
‘나’가 ‘제제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누군가를 좋아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 뿐’이라고 토로하고 있는 걸 보면, 화자가 보기에 제제의 사랑은 나르시시즘에 불과합니다. 제제의 사랑은 타인이 아닌, 늘 자신을 향해 있어, ‘나’는 섣불리 다가갔다가 입게 될 상처가 두려운 건지도 모릅니다.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은밀하고 부질없는 짝사랑은 연애/로맨스 서사에서 가장 정통적인 플롯의 하나이지만, 작가가 그것을 의도했는지, 만약 그랬다면 제대로 구현되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결국 이 작품에 남는 건 오직 작가의 수다와 말발입니다. 피상적인 인물들에 이야기는 얄팍하고 이성애자 독자들에게 퀴어들에 대한 편견만 부추기고 마는, 공허한 이야기만 남게 됩니다.
이 작품이 퀴어 문학으로서 의미를 지니려면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작품집의 표제작이자 그 안의 또 다른 퀴어 소설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서 작가는 그 ‘무엇’을 시도한 것처럼 보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여러모로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과 공유점이 많지만, 외양으로나 내용으로나 보다 진일보한 퀴어 소설로 읽힙니다.
그렇게 읽은 이유는 이 작품이 퀴어들의 ‘특수성’을 다루면서 보편적인 삶의 문제의식을 건드리고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두 주인공은 영화감독으로서, 그리고 현대무용가로서 별 볼일 없는 성취에 실패와 좌절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지극히 사적인 ‘게이 라이프’의 면면을 들춰봐도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실패’는 오늘날 우리 주변의 많은 실패자들, 취업난에 허덕이고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언감생심이며, 현실에 위협받아 스스로 꿈과 희망을 등지고 사랑을 품고 있지만 하는 게 아니라 앓듯이 겪어내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애틋하고 따뜻합니다. 실패는 겪었지만 그것이 패배는 아니며 실패의 경험으로 ‘루저’로 판단하지 않으려는 관용과 희망이 보입니다.
남성 동성애자로서 ‘나’와 ‘왕샤’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부정합니다. 작가는 이들에게 단지 ‘벽장 밖으로!’를 외치기보다, 가장 먼저 제 스스로의 마음과 본능에 눈을 뜨고 자신을 인정하라 독려합니다. 형식적인 ‘커밍아웃’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누군지 알고, 스스로를 돌보고 외부의 혐오와 차별의 시선에 맞서거나 무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어렵지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신선했고 주목했던 점은 이 작품의 ‘메타 소설’로서의 기능이었습니다. 헐리웃의 감독 ‘웨스 크레이븐(Wes Craven)’이 자신의 영화 《스크림(Scream)》에서 다수의 호러 영화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듯이, 작가는 화자인 ‘박감독’과 ‘오감독’의 격론을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퀴어 서사들에 대해 자기반성과 성찰의 일침을 날리고 비판을 서슴지 않습니다.
작가의 등단작인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와 <부산국제영화제>는 하나의 작품으로 읽히는 연작입니다. 감칠맛 나는 문장과 각자 주도하는 작품 안에서 ‘대상’이었던 인물들이 제 차례가 되면 독자들의 섣부른 편견을 서서히 깨부수고 자신을 서슴없이 드러내어 캐릭터화되는 방식은 좋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그들의 사연, 설정 뿐인 이야기,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한 진행과 판을 깔아줘도 제대로 놀지 못하는 답답함 등에, 두 연인이 등장하는 장편의 서두를 본 것 같아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작품집은 말미로 갈수록 힘이 달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난해하고 두서없는 이야기에 인물들과 감정은 대체로 모호하고 작가의 장기인 ‘쫄깃한 문장’에도 그 탄력이 떨어집니다. 특히 기계적이고 관념적인 문장은 식상해 보입니다. 하지만 <조의 방>이나 <세라믹> 두 작품이 퀴어 소설로 읽힌다는 건 재미있습니다.
<조의 방>에는 타인들이 부여한 가면을 벗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남자와 필요에 따라(자신을 감추기 위해) 가면들을 바꿔 쓰는 ‘수’가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욕망은 서로 다른 듯, 닮았습니다. 자발성의 차이를 제거하면, 피상 아래 본질이 가려져 있다는 두 사람의 공통점은 퀴어들의 ‘익명성’과 성격화된 ‘커버링(covering)’을 연상하게 합니다. 수갑이나 채찍, ‘수’로부터 배설물을 요구하는 남자의 취향은, 퀴어들에 대한 편견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허튼 고백처럼 들리지만 진심이 깃든 ‘사는 게 힘들다’는 수는 과거의 좋았던 시절(태어나기 이전의 상태)을 보낸 ‘조의 방(엄마의 자궁)’을 그리워하며 ‘다 녹아버려 모두 하나가 되는’ (無의) 상태로의 회귀를 꿈꿉니다.
<세라믹>의 주인공에게 가해지는 압박 역시 퀴어들에 대한 이성애자들의 편견에 근거를 둔 것처럼 보입니다. 기독교의 동성애에 대한 거의 폭력에 가까운 혐오, 동성애를 정신병이라 규정지으며 그 주된 원인을 어린 시절의 성장 배경, 특히 그릇된 모성애와 부적절한 미러링(mirroring) 등의 감정적인 왜곡에서 찾으려는, 일부 정신병리학계의 주장과 오해에 대한 반발로 여겨집니다.
편견과 혐오는 무지에서 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는 끝없이 대상화되고 공포를 야기합니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 존재의 실체를 깨닫고 그것과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공포와 혐오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그림자’라는 걸 알게 됩니다.
***
‘퀴어 문학(Queer Literature)’을 설명하고 규정지으려는 노력이 그동안 (주류 문학계가 아니라), ‘LGBT 커뮤니티’에서 (비공식적으로) 논의되어 온 건 사실이지만, 어느 하나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함은 개인적으로 아쉽습니다.
혹자는 퀴어 캐릭터의 등장만으로 퀴어 소설의 필요 조건을 충족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퀴어들의 삶의 ‘특수성’을 그려내야 한다고도 하며, 그 외에 삶의 보편성을 담아내야 비로소 퀴어 문학의 범주에 든다고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퀴어 소설 역시 문학의 한 갈래이므로,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현실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종전의 퀴어 소설이 정체성과 커밍아웃 같은, 소수의 특이성에 국한된 개인적인 서사에 머물렀다면, 앞으로의 퀴어 소설은 그 이상의 이슈들을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퀴어의 삶을 넓은 인간관계 안에서, 사회적 맥락을 통해 보여줘야 합니다. 퀴어를 소재로 다루지 않고 그들의 삶을 주제로 확장시켜야 합니다. 그들과 세상간의 역학, 더 넓은 네트워크를 그리고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퀴어들의 이야기가 비틀리고 왜곡된 기괴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공감이 가능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됩니다. 독자들이 그런 작품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건 퀴어들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작가가 인식한 세상입니다. 퀴어 문학 장르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보다 그들이 속한 세계입니다. 그들의 삶이 폐쇄적일지라도(그들을 탓할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들의 이야기들은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녀야 합니다.
과거에 ‘야오이’로 시작해 오늘날 웹소설 장르에서 ‘B/L물’이니 ‘G/L물’이니 하는 (다소 민망한) 이름표를 달고 있기는 해도, ‘퀴어’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들은 꾸준히 생산되고 소비되어 왔습니다.
그동안 음지에서 비밀리에 거래되듯 쓰이고 읽혔던 퀴어 소설이 많은 작가들(동성애자 작가들뿐 아니라 이성애자 작가들까지)에 의해 창작되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어엿한 문학 장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건, 그들의 인권이나 사회문화적 측면 이상으로, 문학이 보다 다양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야기’ 자체를 쓰고 즐기려는 한 사람으로서, 보기에 즐겁고 유쾌한, 바람직한 변화이고 흐름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박상영 작가의 등장과 발견은 무척 의미 있는 일입니다. 작가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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