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검은 고양이_어셔가의 몰락-에드가 알렌 포-리뷰

달콤한 쿠키 2020. 3. 25. 06:31


<검은 고양이>라는 제목만 봐도 떠오르는 영상이 있습니다. 무너진 벽 안에서 발견된, 머리가 깨진 여자 시체와 그 머리 위에 웅크리고 앉은 검은 고양이.

무시무시한 우랑오탄이 삽화가 해리 클라크의 솜씨이고, 화염에 휩싸인 어셔 저택의 웅장한 모습이 쟝 앱스탱이 카메라로 부린 마술이라면, 검은 고양이와 여자 시체가 만들어낸 기이한 미장센과 괴기스러운 화면은 제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라 더욱 생생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삼중당 문고로 만난 포우의 <검은 고양이>는 한동안 괴기 소설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강렬함과 더불어 그 감상은 지속되다가, 서른 즈음에 이르러 다시 읽은 이후로는 알코올의 폐해를 경고하는 도덕적인 이야기가 됐다가, 그리고 십 몇 년을 더 보낸 후, 엊그제 읽은 <검은 고양이>는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는 남자의 실패한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게 됩니다. 세월을 따라 같은 작품임에도 감상이 다른 이유는, (아마도) 살면서 쌓아온 개인적인 경험들이 개입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작품 안에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화자에게는 불안이 엿보입니다.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한 불안, 가난한 살림을 아내에게 떠맡겨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불안, 미성숙한 자아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술에 의존하다가 자신의 불안과 그에 따르는 분노, 삶에 대한 두려움을 고양이에게 투사하고 그 비열한 의도는 우발적인 살인으로까지 이어집니다. 불안의 원인이나 실체, 그것을 다루는 방법 같은 것들에 대해서 작가는 함구합니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자체가 불안의 근원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발함으로서 화자는 자신을 교수대에 몰아넣어 그 원초적인 불안을 종식시키려 합니다. 이런 자기 고발의 테마는 작가의 다른 작품, <고발하는 심장>에서 반복됩니다.

 

다른 모든 것은 막론하고, 작가가 이 작품에서 가장 잘 한 것(혹은 큰 성과를 낸 것)은 결말의 임팩트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벽 속에 숨겨진 시체와 고양이가 그려내는 영상은 그로테스크함 그 자체입니다. 기괴하면서 동시에 아름답습니다.

이후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검은 고양이의 흔적을 발견하는 건 꽤 재미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죽음의 사냥개>는 검은 고양이의 후손이며, ‘에밀 졸라테레즈 라캥에 등장하는, 살인에 따르는 죄책감과 불안의 광기에 시달려 키우던 고양이를 죽이는 로랑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화자의 분신입니다. 이천년 대 초, 충무로에 호러 영화의 붐을 불러온 안병기감독의 영화 에서는 벽에 매장된 시체가 귀신이 되어 벽을 뚫고 나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딕(gothic) 소설의 전형을 보여주는 <어셔 가의 몰락>잘 빠진호러 소설입니다. 으스스한 분위기와 어둠침침한 무대, 병약하거나 의뭉스러운 인물, 충격적인 사건과 웅장한 결말까지. 많은 고딕 소설들이 제 삼의 화자를 등장시켜 그가 보고 듣고 겪은 일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구성을 취하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무대가 되는 어셔 가문의 대저택(혹은 )입니다. 고딕 장르에서 공간적 배경은 보통 소재 이상의, 거의 캐릭터에 맞먹는 중요성을 갖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작품의 초입, 화자가 로더릭을 찾아가는 부분에 묘사되는 어셔 저택의 모습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작가가 묘사에 공을 무척 들인 티가 납니다.

 

재미있는 건, 오늘날 장르 문학, 혹은 장르 영화에서 주로 사용하는 많은 클리셰들의 원형을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두 남매는 기형의 괴물들, 살인마, 식인귀들의 조상격이고, ‘매들라인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클리셰의 원조라고 해도 무방하며, 대단원에서 화염에 휩싸이거나 붕괴되는 건물을 보여주며 막을 내리는 소설이나 영화는 당장 제목을 열 개 대라고 해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합니다.

 

생매장이라는 소재 역시 이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요즘에야 살아 있는 채로 땅에 묻힐 일은 절대 없어 보이지만, 포우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엔 생매장 공포증(Taphephobia)’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포우 역시, 이 작품 외에도 <아몬틸라도의 술통>, <발데마르 사건의 진상>, <때 이른 매장>, 등등, 산 채로 매장당하는 공포를 소재로 많은 단편을 썼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약간 우려스러운 것은 위 두 작품에서 드러나는 여성성, 여성 캐릭터들의 활용입니다. <검은 고양이>의 아내는 (직접적인 원인은 고양이가 제공하지만) 화자 안에 내재된 폭력성을 촉발하는 동시에 화자의 죄를 고발합니다. 작품 안에서는 아내에 대한 폭력은 단지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뉘앙스로 묘사하며 아내와 화자 사이에 고양이 한 마리를 놓음으로서 그 의도를 교묘히 감추지만, 실제로 화자가 죽이고 싶었던 건 아내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내를 제거하면 자신을 옭죄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던 건 아닐까요. 작가는 화자의 아내를 악과 불행의 원흉처럼 다룹니다.

 

<어셔 가의 몰락>에서도 매들라인은 악의 초상처럼 등장합니다. 매들라인은 로더릭과 화자를 불안에 떨게 하고 죽음을 가장하고 생매장 당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 최악의 공포를 안기며, 결국 로더릭의 죽음을 야기합니다. 로더릭과 매들라인의 관계를 에고(Ego)와 이드(Id)의 관계로 보려는 시도도 있지만, 미국 최초의 전업 작가로 항상 돈에 쪼들리고 평생을 궁핍하게 살았던 포우가 이 작품을 그런 의도로 구상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펄프 소설을 쓰는 기분으로, 잡지에 실리면 받게 될 원고료를 기대하며 써내려가지 않았을까요.

 

 



최애(最愛) 외국작가 탑 텐을 뽑으라면, 물론 그때그때 약간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리스트에 꼭 포함되는 작가들이 몇 명 있습니다. 에드가 앨런 포는 그들 중의 한 명입니다. 사랑하고 아끼며 닮고 싶은, 그런 작가 중의 한 명이죠.

그런 이유로 이런 작가의 이런 작품에 대해 감상을 적는다는 게, 적어도 저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작가의 이런 작품은 늘 옳기 때문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감히이런 생각이 들면서 움츠려 드니까요.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대표작인 두 단편을 다시 읽으며 새삼 깨닫는 게 있었습니다. 읽고 또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이야기를 짓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고전이라고 항상 옳은 건 아니지만 포우의 소설들은 언제나 옳습니다. 팬심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