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들마다 굵직한 이슈들을 다룬다.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면서도 이야기들마다의 깊이가 있다. ’청탁(혹은 주문)‘과 ’생산’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직업인’으로서의 작가들이 창의력을 잃지 않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 여겨지는데, 최진영이란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게 놀랍다. 작가가 전천후라는 확신이 든다.
미래의, 가상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쓰게 될 것>은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전쟁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규모가 큰 살인이고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폭력이다. ‘검은 총(22쪽)’이나 ‘고양이(23쪽)’처럼 느닷없이 등장한 그것은 ‘처마 아래 둥지(21쪽)’의 평화를 너무나 쉽게 파괴하며, 그 안에서 인간은 ‘종이 인형(17쪽)’처럼 무력하고 훼손되기 쉬운 존재로 전락한다.
전쟁이라는 지속되는 폭력 아래 할머니는 냉소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한다(시간이 흐를수록 기도는 점점 짧아졌다. 은총과 평화가 제일 먼저 사라졌다. 다음으로 자비와 사랑이 버려졌다. 용서와 구원을 포기했다... 중략... 할머니는 오직 그것(죽은자의 영혼을 보살피는 것과 영원한 안식)만을 요구했다. 현실에 없는 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18~19쪽)).
반면 엄마는 화자가 발견한 검은 총을 가방 안에 숨기며 ‘그걸 가지고 있으면 결국 쓰게 될 거야. 남에게든 나에게든(36쪽)’라고 단언한다. 때때로 수단(도구)이 목적을 만든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같다.
거의 모든 불행의 원흉은 인간이지만 그 안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것도 결국 인간이다. 작가는 극한 상황에서도 인류애와 휴머니즘을 기대하는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기후위기’라는 이슈를 상징적으로 전달한 <썸머의 마술 과학>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아빠’의 빚은 그 여파가 당장 가족들에게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그리고 확실한 불행의 형태로 드러날 것이다.
환경 문제 역시 그런 특수성을 갖는다. ‘썸머’가 연출하는 마술 장면에 등장하는 표면 장력은 그 한계가 있다. 외부의 힘과 장력의 균형이 깨지면 결국 물이 넘칠 테고, 그것은 곧 지구의 위기에서 나아가 인류의 멸망을 의미한다.
캐릭터(화자)의 유아적인 사고와 작가의 현실 인식이 충돌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독자를 설득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SF로 읽을 수 있는 <인간의 쓸모>는 ‘인간과 기계’의 대립, 혹은 공존을 그린다.
작품 속 세계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몰개성, 집단화, 계급화 등의 이슈, 거의 모두가 권력 상승을 꾀하는 반면, 개인적인 욕구, 취향, 개성 등이 거세되었다는 점에서 현재에 대한 일종의 풍자, 은유, 혹은 경고로 보인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과연 인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능가할 수 있을까, 인간의 편리는 결국 도구화로 이어지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목적의식으로 자칫 고루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은 아쉽다.
생일 파티 장면을 통해 한 가족을 살짝 엿본 듯한 <디너코스>는 가족 구성원들의 개별성, 그들이 영원한 공동체인 동시에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 등을 이야기한다.
아빠에 대한 큰딸(나영)의 인식엔 오류가 있다. 나영은 아빠의 퇴직 이후의 삶(인생후반전)을 ‘제2의 인생’으로 오해한다(221쪽), 불완전한 기억으로 아빠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억이란 게 구멍투성이다. 아빠는 자신의 비밀을 가족들에게조차 털어놓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단어로 묶여 있지만 그 구성원들은 각각의 개인이다. 서로에게 엄연한 타인이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오만이다.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우리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겸손함을 잃지 말 것을 부탁한다.
모녀 서사인 <차고 뜨거운>은 제목 그 자체로 작품을 대변한다. 가족 사이에 존재하는 ‘뜨거운’ 애정과 ‘차가운’ 증오, 그 사이 어딘가에 인물들의 감정이 존재한다.
사랑을 회피하고 의심하는 화자는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것은 과거,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어린시절의 기억에서 연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딸이 구하는 사랑과 엄마가 주는 사랑은 결이 너무도 달랐다. ‘혈연’이라는 관계는 모녀에게 안온한 울타리이기보다 족쇄였다. 진짜 사랑(이모 가족) 앞에선 그들을 시샘하고 의심하고 모방한다.
모녀는 화해하고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작가는 가족 간의 이런 불안과 갈등을 해소 불가능한 것으로 남겨 놓는다. 이런 갈등이 가족의 틀을 벗어날 때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작품집 안에서 가장 무거운, 두려운 이야기로 읽힌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딸과 그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을 그린 <홈 스위트 홈>은 개인적으로 작품집 안에서 최고의 작품이었다.
‘웰 다잉’을 이슈로 작품 전반에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그럼에도 마냥 어둡지만은 않은,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이 엿보이는 작품이었다. 이는 아마도 화자가 보여주는 용기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는데, 작품집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적당한, 아련하고 추억에 젖는 듯한, 나의 이야기가 아님에도 이미 경험했다고 느껴진, 독특한 감상을 남긴다.
‘시간은 발산한다(262쪽)’는 표현이 재미있다. 화자는 이야기 안에서 시간이 뒤섞이는 경험을 하는데, 이는 기억을 인식함에 있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양상을 의미하는 듯 싶다.
이런 경험은 시제의 문제가 아니다. 기억의 본질은 ‘왜곡’이며 스토리텔링(각색하기)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걸 감안할 때, 경험하지 않은 것을 이미 경험했다고 느끼고 미래를 예측하거나 화자의 언급처럼 ‘미래를 기억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설정이 주는 환상성, 죽음이라는 미지의 소재가 주는 막연한 불안감, 그것에 충분한 대비를 꾀하는 인물의 용감한 의지, 폐가라는 공간적 배경이 암시하는 삶의 원초성 등이 어우러져 한 편의 슬픈 동화 같은 여운을 남긴다.
어른스럽지 못했던 과거의 시절을 회상하는 화자를 통해, 진정한 관계란 어떤 것이며 타인을 대할 때 우리의 태도를 조망하는 <유진>, 우울한 표면 아래 재기발랄함을 감추고 있으며, ‘사랑은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108쪽)’이라는 문장으로 축약되는, 간결하지만 진중한 무게감을 전달하는 <ㅊㅅㄹ>등 다양한 작품들이 포진되어 있다.
여덟 편의 이야기가 삶의 다양한 순간들을 다양한 소재와 형식, 다채로운 분위기로 흥미를 준다. 작품마다 의미가 풍부해 독자들마다 해석의 여지도 다양해 보인다.
읽고 나면 ‘이것으로 됐어’ 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읽을수록 ‘더 알고 싶어’라는 마음이 드는 작가가 있는데, 최진영은 후자 쪽이다. 건강하게, 부지런히 써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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